며칠 뒤 어머니를 모시고 집 근처 병원에 갔다. 간단한 혈액 검사를 해본 결과 몇 가지 수치가 상당히 낮게 나왔다. 혼자 사시며 제때 드시지 못해 생긴 결과라고 했다. 이에 기력 보충을 위한 처방을 받고 식사도 살뜰히 챙겼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도리어 안색이 창백해지고 숨을 가쁘게 쉬시는 등 전에 없던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으셨다.
청천벽력 같았다. 게다가 암 말기라니. 한평생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의 일생이 스쳐 가 눈물이 쏟아졌다. 무조건 낫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 한 번의 항암치료 외에는 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셨다. 담당 의사는 회복이 어렵다며 완화치료를 권했다.
의사에게 울며 매달려 봐도 소용없었다. 어머니의 커진 배가 복수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내 가슴을 치게 했다. 슬프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곁을 지켜 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함께 호스피스 병원에서 생활을 시작했다.병원에서 지내기란 예상보다 힘겨웠다. 그렇지만 그런 불편이 무슨 대수랴. 나는 오직 어머니에게만 집중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어머니를 돌보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온종일 부산하게 움직이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조금씩 지쳐 갔다. 간이침대에서 지내는 바람에 만성 허리 통증에 시달렸고 매 끼니 급하게 먹는 탓에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무엇보다 잠이 부족해 너무 고달팠다.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정신은 몽롱했다. 마치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약한 바람에도 콜록거릴 만큼 면역력도 최악이었다.
더욱이 언제부터인가 또 다른 감정이 들었다. 병원에만 처박혀 있는 내 신세가 무척이나 처량했다. 훗날 사회로 나갔을 때의 모습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해왔던 일들마저 잃게 될까 두려웠다. 비난의 화살이 겁이 나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속은 용광로처럼 끓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 계기가 있었다. 어머니를 모신 병원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퇴직자가 여럿 되었다. 제약회사에서 일했던 사람, 제조업체에 다녔던 사람 등 다들 몇 년 전 회사를 나온 뒤 가족을 돌보는 이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희망퇴직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50대 후반의 김모 씨였다. 김 씨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스스로 직장을 정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며칠씩 휴가를 내 찾아뵀지만 돌아서면 마음이 무거웠다고도 했다. 어머니 옆에 있지 못하는 게 줄곧 속상했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선 침통함이 묻어났다. 그러다 끝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데 나로서는 상당히 놀라웠다. 어차피 떠날 곳이었기에 차라리 좋은 기회였다는 대목에서는 존경심마저 들었다.유사한 상황에서 그와 나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퇴직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퇴직을 자기 주변을 돌아보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퇴직 이후의 시간을 덤처럼 여기며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세워가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퇴직 이후에도 순전히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외면했다. 부모님과 따뜻한 대화, 눈 맞춤, 감사 인사까지 언젠가는 하겠지만 당장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 부모님은 오래 기다려 주시지 않았다. 퇴직 후 인생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듯 부모님과의 시간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성과물을 쫓는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말았다.
감사하게도 설 연휴가 고비라던 어머니는 아직은 괜찮으시다. 요즘이 내겐 선물처럼 느껴진다. 여느 해보다 풍성한 카네이션 앞에서 조용히 웃으시는 어머니를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어머니와의 어버이날, 나는 생각했다. 비록 멈춰 있는 이 시간은 내 이력서 어디에도 남지 않겠지만 내 생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정경아 작가 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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