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서양식 건축 자랑에… ‘내 동리 명물’ 내세워 ‘조선 정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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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리 서울대 연구원 ‘日 경성 사진엽서’ vs ‘동아일보 경성백승’ 비교 논문
일제, 조선銀-경성역 등 잇달아 지어… “으리으리한 미관” 식민통치 정당화
동아일보 50일간 ‘경성 100곳’ 소개
‘공평동 재판소’ ‘현저동 형무소’ 등… 비판적 설명 함께 역사속 장소 소개

만약 오늘날 한 도시에서 ‘명물(名物)’을 선정한다고 하면 상당한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 자신의 입장이나 보는 기준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지배자인 조선인 사이에선 경성의 ‘미관(美觀)’과 ‘명물’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생각이 충돌했다.

서유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논문 ‘경성의 미관 형성과 조선인의 대안적 이미지’(2023년 학술지 ‘서울학연구’ 가을호)에 따르면 일본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든 ‘경성 사진엽서’와 동아일보의 사진 연재물을 묶은 ‘경성백승(京城百勝)’은 이러한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31일 동아대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가 개최하는 학술대회 ‘팸플릿을 펼치다, 경성을 만나다’에서 서 연구원은 해당 논문을 바탕으로 식민통치에 비판적 시선을 담은 ‘경성백승’ 등의 내용을 소개한다.

● 일제, 서양건축 강조해 지배 정당화

일제는 경성을 근대적 도시로 정비하면서 조선은행, 경성역,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서양식 건축물을 잇달아 지었다.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내세워 식민통치가 조선의 도시를 문명화하고 있다며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경성의 관광산업과 식민 지배의 홍보를 위해 발행된 사진엽서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 히노데(日之出) 상점은 이런 건물들을 담아 ‘경성명승(京城名勝)’이란 이름으로 엽서를 발행했다. 엽서에 실린 사진은 장대한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구도다.

서 연구원은 “건물의 전면과 측면을 3∼4 대 1의 비율로 잡아 시각적 쾌감을 주고 형태적 요소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며 “이런 이미지를 통치의 성취물로 연결시켰다”고 설명했다. 권력을 상실하고 관광지로 전락한 경복궁 등 조선 궁궐은 일제 통치기구와 대조되며 ‘경성 미관’의 또 다른 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조선인이 경성을 두고 이런 사진엽서를 발간한 사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서 연구원은 “식민통치가 만든 경성의 미관을 조선인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성백승, 조선 역사 담긴 장소성 강조

‘내 동리 名物(명물)’ 1회가 실린 1924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종로 종각과 안국동 감고당을 다뤘다.
동아일보DB

‘내 동리 名物(명물)’ 1회가 실린 1924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종로 종각과 안국동 감고당을 다뤘다. 동아일보DB
반면 동아일보사가 1929년 발간한 책 ‘경성백승’은 식민통치에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북촌 중심으로 장소성을 재발견했다. 이 책은 1924년 6∼8월 50일간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한 사진 기사 ‘내 동리(동네) 명물’ 시리즈를 묶은 것이다.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던 경성 100곳을 글과 함께 소개한 시리즈다.

경성백승은 장소의 내력과 역사에 주목한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공평동 재판소’는 “105인 사건”과 “조선 산하를 진동하던 OO운동(3·1운동)”, “흰 수염을 뻗치고 강개하게 재판장을 논박하든 강우규 (열사)”가 재판을 받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수송동 기마대’는 좌우로 담장이 잘린 기마대 입구 사진을 보여주며 “민중의 진정한 부르짖음까지 이 기마 순사대의 말굽으로 짓밟았다”고 고발했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현저동 형무소는 오늘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됐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현저동 형무소는 오늘날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됐다.
‘서린동 구치감’ ‘현저동 형무소’(서대문형무소) ‘통의동 동척 사택’ 등도 일제에 대한 비판적 설명과 함께 소개했다. ‘안국동 감고당’ ‘숭사동 월사구기’ ‘권농동 경판각’ 등 역사 속 장소를 소개하며 조선의 통치를 회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소격동 종친부는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소격동 종친부는 경근당(敬近堂)과 옥첩당(玉牒堂)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경성백승에 담긴 사진은 프레임이 가로보다 세로가 길어 시원한 공간감은 확보되지 않았다. 서 연구원은 “경성 사진엽서가 선호했던 장대한 건축물의 미학을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반(反)미학적 구성’을 선택했던 것”이라고 했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재동 백송(白松)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으며, 헌법재판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동아일보 ‘경성백승’(1929년 발간)에 소개된 서울의 ‘내 동리 명물’과 오늘날의 모습. 재동 백송(白松)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으며, 헌법재판소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꼭 특별한 장소만 소개한 것도 아니다. 체부동 ‘돌함집’은 “어느 공주댁”으로 공주가 죽을 때 보물을 돌함에 넣어 대청 아래 묻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고 소개했다. 집주인이 바뀔 때마다 대청 밑을 파봤지만 돌함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서 연구원은 “경성백승은 일본인의 경성 미관을 비판하면서 대안적 이미지를 제시했다”며 “통치의 폭력과 불평등을 가시화해 비판하고, 급변하는 현재에 묻혀 사라져 가는 조선인의 역사를 회복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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