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사실이었다. 금, 은, 동메달리스트는 물론이고 4위, 6위, 7위 선수도 약물의 힘을 빌렸다는 게 몇 년 뒤에 밝혀진 것이다. 8위였던 김민재의 순위는 수직 상승했다. 갑작스레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김민재는 “많은 축하를 받았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떤 종목보다 정직해야 할 역도가 더럽혀졌기 때문”이라며 “그래도 내가 쏟은 땀과 노력이 보상받았다고 좋게 생각하려 한다”고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런던 대회는 그렇게 비극으로 시작해 희극으로 끝났다.
돌이켜보면 그의 역도 인생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고교 시절 경량급 유망주였던 그는 대학 1학년 때 돌연 역도를 그만뒀다. 체중 조절이 힘들었고, 부상이 겹쳐서였다. 중국집 배달과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가 현역으로 군대에 갔다.
그를 일으켜 세운 건 지금은 아내가 된 동갑내기 친구 이연화 씨였다. 역도 국가대표였던 이 씨의 응원 속에 다시 바벨을 잡은 김민재는 잠재력을 터뜨렸다. 코치도 없이 혼자 훈련했는데 한국기록급 성적을 냈다. 주변에선 “약을 먹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역도계에서 그는 ‘약쟁이’로 불렸다. 태극마크를 단 후 체계적인 훈련을 받자 기록은 일취월장했다.은퇴 후 잠시 개인 사업을 했던 김민재는 2020년부터 제주 남녕고에서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주도 체육회 역도 전임지도자로 먼저 제주에 자리 잡은 아내의 권유를 이번에도 따랐다. 이 씨가 지역 내 유망주를 발굴하면 김민재가 남녕고에서 키우는 식이다. 처음 왔을 때 단 두 명밖에 없던 선수가 지금은 중학생을 합치면 20명가량 된다. 지난해 소년체전에서는 여러 선수가 메달도 땄다.
역사(力士) 유전자를 물려받은 세 자녀도 모두 역도를 한다. 장녀 태희 양(16)은 남녕고, 차녀 다현 양(14)은 중학교에서 역도 선수로 뛰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명준 군(11)도 역도 선수를 꿈꾼다.김민재는 “태희는 엄마처럼 용상을 잘하고, 다현이는 나를 닮아서 인상에 강하다”라며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이 다 좋은 선수가 됐으면 한다. 제주를 한국 역도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라고 말했다.
4월 11일 세계 도핑방지의 날 즈음 김민재는 가족들과 함께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가 마련한 행사에 참가하고, 프로야구 LG 경기의 시구자로도 나섰다. 김민재는 “정직한 땀과 깨끗한 스포츠의 가치를 믿는다”고 시구 소감을 밝혔다. ‘약한 사람’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이헌재 스포츠부장 uni@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