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붓질' 잇는 파리 여인…"서예의 힘은 선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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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르 키토가 제작에 참여한 프랑스 파리 아베스광장의 설치작품 ‘사랑해 벽’. 세계 250개 언어로 쓰인 311개의 ‘사랑해’가 새겨져 있다. /ⓒ클레르 키토

클레르 키토가 제작에 참여한 프랑스 파리 아베스광장의 설치작품 ‘사랑해 벽’. 세계 250개 언어로 쓰인 311개의 ‘사랑해’가 새겨져 있다. /ⓒ클레르 키토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아베스광장의 제앙릭튀스 정원에는 세계 250개 언어로 쓰인 311개의 ‘사랑해’라는 글씨가 새겨진 특별한 벽이 있다. 2000년에 세워진 40㎡ 규모 설치작품으로 에나멜 처리된 612개의 화산석 타일로 제작됐다. 프랑스어, 영어, 아랍어, 스와힐리어, 이누이트어, 한국어까지 각각의 문자는 단순한 기호를 넘어 한 개인의 감정과 문화적 맥락을 담은 작은 우주와 같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문자들은 마치 인류 공통의 감정을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해 놓은 감정의 사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레데릭 바롱과 함께 이 벽의 캘리그래피를 맡은 사람은 클레르 키토. 키토는 1964년 파리에 설립된 유럽 최초의 동양미술 교육기관인 파리동양미술학교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응노, 박인경 화백에게 사사했다. 이응노 화백이 세상을 떠난 지 37년이 흐른 지금,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품은 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 있다.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그의 작업 세계를 마주하며 동서양을 잇는 예술의 여정과 스승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오고 있는지 대화를 나눴다.

클레르 키토가 프랑스 이시레물리노에서 연 개인전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한지수

클레르 키토가 프랑스 이시레물리노에서 연 개인전에 전시된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한지수

▷동양 서예와 수묵화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서양의 전통적인 조형예술 교육을 받았고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며 포스터와 로고, 심볼을 만들어 왔습니다. 글자를 다루는 일과 흑백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만큼 서예가 제 삶에 들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서예와 수묵화는 차근차근 배워 나갔지만, 서양식 교육과 동양 미술의 새로운 시선 사이에서 늘 작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빛과 그림자로 대상을 관찰하고 목탄이나 연필처럼 고쳐 그릴 수 있는 재료로 작업해 왔는데 이 분야에서는 하나의 요소를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수정 없이 한 번의 선으로 그려내야 했습니다. 선 그 자체가 곧 힘이고 볼륨이며 회화였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손에 밴 습관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이응노

이응노

▷이응노, 박인경 화백과의 첫 만남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수업 방식은 어땠습니까.

“파리동양미술학교의 수업은 파리 시립 동아시아 미술 전문 기관인 세르누치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이응노 선생님은 ‘문인의 네 가지 보물’ 문방사우를 소개한 뒤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잡고 함께 ‘한 획(一)’을 그었습니다. 수업은 침묵 속에서 흘러갔고 먹을 갈고 획을 긋기를 거듭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집중도 깊었고, 감정도 그만큼 깊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업에서 선생님이 붓 하나에 여러 농도의 먹을 머금게 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고, 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려보라고 권하셨지요. 정말 가슴 깊이 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응노 선생님과 박인경 선생님은 학생 개개인이 필선을 보완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점은 결코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학생들 역시 예술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마다의 예술이 깊이 있게 피어날 수 있도록, 섬세한 몸짓과 시선, 그리고 의미 있는 말을 건네셨죠.”

박인경

박인경

▷이응노 선생님의 작품에는 항상 인간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당신의 작품에도 영향을 줬나요.

“이응노 선생님의 작품에서 인간은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후기 작업에서 인간들은 하나의 기호처럼 그려지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군중의 행렬을 이룹니다. 저 역시 늘 인물과 얼굴, 군중을 그려 왔는데 이 인간의 모습은 제가 걸어온 길과 머문 곳, 그때그때의 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누드 크로키와 해부학을 공부하며 작업했습니다. 이후 도시에서 살아가며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을 관찰하고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파리 교외의 군중에 깊은 인상을 받아 서로 교차하고 겹치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폭에 쌓여가는 군중의 밀도는 저를 시각 너머의 감각으로 이끌었고, 그 안의 세계가 곧 작업의 중심이 됐습니다.”

▷프레데릭 바롱과 함께한 ‘사랑해 벽’ 작업에서 250개 언어를 하나의 서예 작품으로 통합하는 과정에 본인만의 미학적 원칙이 있었습니까.

“바롱이 수집한 문자들은 서체와 굵기가 매우 다양했습니다. 저는 먼저 글자마다 굵기를 다듬어 어느 한 글자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글자들을 어우러지게 놓을 때는 각 글자가 지닌 감각을 따라가며 커다란 퍼즐을 맞추듯 배치해 나갔습니다. 글자마다 힘이 실린 곳, 서로 호응하는 선들을 살폈습니다. 특히 상상의 여백을 열어주는 낯선 형태의 문자를 좋아했습니다. 시선이 자유롭게 흐르고 곡선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예기치 못한 마디나 끊김이 나타나도 그저 흐름에 맡기는 것이 작업 방식이었습니다.”

클레르 키토 개인전에 나온 ‘Foules’(군중) 시리즈. /ⓒ한지수

클레르 키토 개인전에 나온 ‘Foules’(군중) 시리즈. /ⓒ한지수

▷2025년 11월 개인전 ‘Interrogations’(질문들)의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최근 전시된 작품들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봉쇄 기간에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전 세계가 ‘이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을 것인가? 우리는 정말 거대한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같은 묵직한 질문들과 씨름하던 시기였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언젠가 인간의 생명 자체가 지구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지구마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덧없는 자각이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인간을 한 사람으로 또는 군중으로 재현하는 일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을 우주의 일부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군중은 풍경이 되고, 대지의 퇴적물이 되며, 물결처럼 흘러가고, 구름 속으로 흩어지며, 마침내 우주의 일부가 됩니다. 작품에 거듭 등장하는 점과 얼룩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담아냅니다.”

▷향후 작품 방향성이나 새로운 도전을 계획하고 있나요.

“지금까지 시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송나라 양만리(楊萬里)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 그 구절이 제게 불러오는 울림을 작업으로 이어가 보고 싶습니다. ‘뜰의 물웅덩이는 쓸어내지 마라/나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보는 것이 좋으니’.”

파리=한지수 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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