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미친 세상, 미친 영화

4 weeks ago 8

사교육에 지친 열한 살 ‘동춘’은 막걸리의 명령에 따라 우주의 근원으로 향한다. 판씨네마 제공사교육에 지친 열한 살 ‘동춘’은 막걸리의 명령에 따라 우주의 근원으로 향한다. 판씨네마 제공

사교육에 지친 열한 살 ‘동춘’은 막걸리의 명령에 따라 우주의 근원으로 향한다. 판씨네마 제공사교육에 지친 열한 살 ‘동춘’은 막걸리의 명령에 따라 우주의 근원으로 향한다. 판씨네마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조기 대선을 앞두고 도덕으로, 양심으로, 상식으로, 심지어는 뇌(腦)로도 이해하기 힘든 미증유 세상이 전개되고 있어요. 미친 세상에 상처받지 말아요. 이럴 땐 미친 영화로 이열치열 치유하면 되니까요. 세상을 획 뒤집어보는 이들 영화 속엔, 어쩌면 토 나오는 현실을 꿰뚫어볼 통찰이 담겼는지도 몰라요.

[1] 우선, ‘슬픔의 삼각형’(2023년)이란 스웨덴산 블랙코미디 영화를 추천해요. 가난하지만 몸 좋고 얼굴 잘생긴 남자 모델 ‘칼’은 잘나가는 여우 같은 여자 모델 ‘야야’와 연인 관계예요. 칼은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 불만이에요. ‘만인은 평등하다’란 슬로건을 내건 패션쇼에서조차 돈 없고 ‘빽’ 없는 관객은 좌석 맨 뒷줄로 밀려나는 모순적 세상에 염증을 느끼죠. 그는 데이트 비용을 매번 자신에게만 전가하는 야야가 불만이에요. “내가 돈을 내기 싫다는 게 아니야. 난 남자와 여자의 평등한 관계를 원한다고!”

그러던 칼은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인 야야가 협찬 받은 초호화 크루즈 탑승권 덕분에 야야와 함께 유람선에 올라요. 유람선은 칼이 염원하는 평등한 세상과는 180도 다른 철저한 계급사회예요. 팁 한 푼 받으려 안달복달하는 승무원들을, 졸부 승객들은 마리오네트처럼 부리고, 화장실 청소하는 동남아 출신의 늙은 여성 ‘애비게일’은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해요. 아, 그런데 별안간 폭풍우가 몰아치며 배가 전복되고, 칼과 야야를 포함한 8명이 간신히 살아남아 무인도에 당도해요.

자, 신분도 돈도 무의미해진 무인도. 이제 생존자 8명은 칼이 갈망하던 평등사회를 이룰까요? 전혀 아니에요. 유일하게 물고기 잡을 줄 알고 불 피울 줄 아는 애비게일이 이젠 계급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른 절대 권력자가 되어 사람들을 노예 취급해요. 더욱 기겁할 일은, 평등을 외쳐온 칼이 간식을 받아먹기 위해 애비게일에게 몸을 판다고요!

평등? 개한테나 줘버려! 세상이 뒤집혀도 지배-피지배의 권력 관계는 변치 않으며, 다만 누가 권력을 독점해 다수를 지배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서슬 퍼런 메시지죠. 어쩌면, 민주주의를 표방한 세상 모든 선거의 본질도 다르지 않은 것 아닐까요? 날 대신할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날 지배해 줄 사람을 내 손으로 뽑는 것 말이에요.

[2] 뭐 이 정도를 가지고 미친 영화랄 수 있냐고요? 그러면 프랑스 영화 ‘디어스킨’(2020년)을 당신께 바쳐요. ‘조르주’란 남자가 밤새 차를 몰아 중고 의류를 내놓은 사람의 집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해요. 전 재산 1000만 원을 주고 남자는 사슴가죽 재킷을 구해 입는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도취돼요. 이윽고 사슴가죽 모자, 신발, 바지, 장갑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슴인지 인간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사슴가죽으로 도배한 조르주는 자기 모습을 캠코더에 담으면서 나르시시즘에 젖어들기 시작해요.

아, 급기야 ‘남다른 재킷을 입은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도착에 빠진 조르주. 천장에 달린 팬(fan)의 날개를 뜯어 검(劍)으로 만든 그는, 재킷을 입은 사람들을 연쇄 살해하는 엽기적 행각을 벌입니다. 조르주는 이런 자신의 끔찍한 모습을 캠코더에 일일이 담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게 돼요. 살인이 거듭될수록, 캠코더에 담기는 영상의 퀄리티도 변해가니까요. 처음엔 조악하기 짝이 없던 수준에서, 점점 더 뭔가 그로테스크하고 예술적인 수준으로 말이에요! 이런 아이러니를 통해 영화는 “유일무이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병적 집착의 결과물이 바로 예술은 아닐까?” 하는 도발적 질문을 던지는 듯하지만, “오직 나만이…”를 외치는 인간 치고 제정신인 인간이 거의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거를 앞둔 작금의 상황에선 훨씬 실용적일 것도 같아요. [3] 제정신이 아닌 건 어른만이 아니에요. 어린아이의 돌아버릴 정신세계를 다룬 한국 독립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2024년)를 꼭 보세요. 열한 살 소녀 ‘동춘’은 유달리 키가 크질 않고 표정이 없어요. 세상이 자신을 너무 괴롭히거든요. 월수금은 수학-영어-페르시아어, 화목은 논술-수학올림피아드-미술, 토일은 창의과학-한국사-태권도 학원을 다녀야 하니까요. 학교 수련회를 떠난 날 밤, 우연히 막걸리를 병째 발견한 동춘은 페트병에 막걸리를 옮겨 담아와 방 안 한구석에 숨겨두는데…. 놀랍게도 막걸리가 발효되면서 ‘뽁뽁뽁뽁’ 하고 나는 리드미컬한 소리를 모스 부호로 표기해 보니 로또 4등 당첨번호! 이후 막걸리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 동춘은 집을 뛰쳐나와 우주가 시작된 근원지점(양조장)을 향해 모험의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에요.

어때요? 세상이 감당 못할 스트레스를 주면 어른들은 정신줄을 놔버려요. 하지만 아이들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탈출해버리죠.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자기파괴보다 강력한 저항은, 그저 새로운 꿈을 꾸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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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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