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사업자에게서 잇달아 ‘경고’ 메시지가 날아온 건 작년 말부터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상 상품별 투자 한도를 넘겼으니 알아서 조정하라는 안내였다.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 허용치는 70%다. 애초 채권형 상품 비중이 높았는데 증시 호조로 달라졌다. 주식형 공모펀드와 상장주식펀드(ETF) 수익률이 뛰었고, 위험자산 비중이 법정 한도를 넘어섰다.
70%를 초과했다고 당장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식형 상품 추가 투자는 불가능하다. 연금을 리밸런싱하려다가 주식 비중을 크게 낮춰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주식자산 한도를 넘어선 계좌는 얼마나 될까. 확정기여(DC)형 사업자 1위인 미래에셋증권에 확인해 보니 지난달 말 기준으로 23.4%에 달했다. 이 증권사에 노후 자산을 맡긴 사람 열 명 중 두 명 이상이 주식형 상품을 추가로 매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미래에셋증권에서만 14만여 명의 발이 묶여 있다. 삼성생명이나 신한은행으로 퇴직연금 운용을 옮겨도 규제를 받는 건 똑같다.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은 미국 401(k)을 벤치마킹한 제도다. 하지만 운용 규제는 훨씬 강하다. 미국에선 가입자가 투자 성향과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 배분을 자유롭게 결정한다. 주식 비중이 압도적이다. 장기적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낼 것이란 믿음에서다. 401(k) 수익률은 연평균 8%를 웃돌고 있다.
퇴직연금처럼 초장기 상품을 운용할 때 주식 비중이 높을수록 유리하다는 건 국내 통계로도 입증된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2015년부터 10년간 퇴직연금의 실적배당형 수익률은 연환산 기준 3.44%였다. 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연 2.09%)보다 훨씬 높다. 글로벌 증시가 동반 급등한 2025~2026년은 반영하지 않은 수치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권역별 주요 회사의 ‘수익률 상위 10%’로 좁혀보면 실적배당형 비중이 평균보다 세 배 이상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우회로를 찾고 있다. 대표적인 게 채권혼합형 ETF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지만 최대 50%까지 주식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험자산 한도에 막힌 가입자라도 이를 활용하면 퇴직연금 내 주식 비중을 최대 85%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2023년 말 8000억원 수준이던 채권혼합형 ETF의 순자산은 현재 15조원 규모로 불어났다.
타깃데이트펀드(TDF)도 마찬가지다. 투자 목표 시점에 맞춰 위험자산 비중을 낮춰주는 등 조건만 충족하면 ‘70% 규제’를 피하는 적격 TDF로 인정받을 수 있다. TDF 순자산은 지난해 말 기준 25조6000억원으로, 8년 동안 18배 넘게 급증했다는 게 금감원의 최근 보도자료 내용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투자 관행이 되레 노후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건 당국도 우려하는 점이다. 50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의 예·적금 쏠림을 수차례 지적했다. 원리금 보장형에만 넣어두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기도 버거울 수 있다는 우려다.
증시 변동성이 큰데 투자 규제를 풀면 손실 위험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위험자산 한도를 없앤다고 해서 주식 투자를 유도하거나 강제하는 건 아니다. 주식형 상품 비중을 10%로 할지, 90%로 할지는 개인이 선택하면 된다. 연금 사업자가 위험자산의 변동성에 대해 충분히 고지해주면 될 일이다. 미국 호주 등 연금 선진국에서 수십 년간 성공적으로 운용한 모델이다. 21년 전 만든 퇴직연금의 ‘70% 룰’은 이제 손볼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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