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한 설명보다 임팩트 있는 단어 하나가 문제의 본질을 더 명쾌하게 짚어줄 때가 있다. 기자에겐 25년 전 접한 ‘뱀파이어 기업’이란 단어가 그랬다. 진념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한 조찬 강연에서 법정관리나 화의에 들어간 수백 개 부실기업을 두고 한 표현이었다. “진작 사라졌어야 할 부실기업이 금융회사의 ‘피’(빚 탕감)를 빨아 살아남은 뒤 마구잡이 덤핑 판매로 정상 기업마저 동반 부실 상태로 몰아가는 문제를 방관할 수 없다”며 ‘뱀파이어 척결’을 약속했다. 정부는 이때 마련한 기업구조조정촉진법 등 부실기업 퇴출 시스템을 활용해 뱀파이어 기업을 어느 정도 정리했다.
거기까지였다. 법정관리나 화의에 들어간 수백 개 기업을 일컫던 뱀파이어 기업은 언젠가부터 ‘좀비 기업’이란 새 이름을 얻더니, 이제는 우리 경제를 아예 좀비 소굴로 만들었다. 벌어들인 돈으로 이자도 못 내는 상태가 3년 연속 지속된 기업이 전체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17.1%(2024년 말 기준)에 이르니 말이다. 외감기업이 대략 3만7000여 곳인 점을 감안하면 6300개에 달하는 좀비가 우리 경제의 혈맥을 막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저금리란 ‘마취제’에 정부의 무차별적인 중소기업 보호정책이란 ‘링거액’이 더해진 결과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높아진 한계기업 비율이다. 부실기업 정리는 대량 실업과 지역경제 위축을 낳는 만큼 자기 손에 피를 묻혀가며 악역을 자처하는 정부는 없었다. 그렇게 20년 넘게 이어진 ‘폭탄 돌리기’의 대가는 혹독했다.
죽어야 할 기업이 살아 있으면 살아야 할 기업이 죽는다. 온갖 지원에 힘입어 덤핑 판매를 하는 탓에 정상 기업의 몫이어야 할 시장을 빼앗아 동반 부실로 몰고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특정 업종에 한계기업이 10% 늘어나면 정상기업의 매출 증가율이 2%포인트 낮아지고, 총자산영업이익률은 0.51%포인트 하락한다.
미래 성장동력의 불씨가 꺼질 수 있다는 건 더 큰 문제다. 혁신 스타트업을 키우는 데 써야 할 나랏돈과 금융회사 자금이 한계기업 연명 치료에 묶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혁신 기업 진입과 낡은 기업 퇴출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창조적 파괴’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우푹 아크치깃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진단은 노벨 경제학상 0순위 후보답게 우리 경제의 급소를 정확하게 찔렀다.
그런 점에서 최근 금융당국이 내놓은 코스닥시장 퇴출 활성화 방안은 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무늬만 상장사’를 빨리 솎아내면 코스닥시장 자체가 건전해질 뿐 아니라 성장성을 갖춘 신생기업이 새로 진입할 틈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유망 스타트업의 증시 데뷔는 그 자체로 경제에 활력소가 된다.
우리 경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옥석 가리기’가 증시 퇴출에 그쳐선 안 된다. 모든 좀비 기업으로 대상을 넓혀 기술력이 떨어지고, 성장 가능성도 없는 곳은 자연스럽게 퇴출 수순을 밟도록 해야 한다. 하수구를 뻥 뚫어야 깨끗한 물이 흘러 들어온다는 점에서 퇴출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위한 비움이다. 물론 대량 실업과 지역경제 침체란 후폭풍은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이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가 아니라 업종 전환 지원, 재취업 시스템 활성화 등 정교한 사회 안전망으로 풀어야 할 별개 문제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는 크게 자랄 수 없고, 묵은 땅을 갈아엎지 않고선 풍년을 기대할 수 없다. 당장 고통스럽다고 곪은 상처를 내버려두면 독소는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이제 좀비 기업에 꽂은 링거를 뽑고 메스를 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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