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본심은 결국 제조 일자리에 있었다.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공장의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가 새삼 일깨웠다. 사태 이튿날 트럼프가 미국에 투자하는 모든 외국 기업을 향해 쓴 트루스소셜 글엔 절실함까지 묻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세계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자국 인력을 ‘합법적으로’ 데려온다면 신속하게 법적 지원을 하겠다”며 “대신(in return) 미국인들을 고용하고 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거친 방식으로 쇠락한 제조업을 단기간에 부활시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트럼프가 ‘메이드 인 아메리카’와 제조업 고용 창출에 얼마나 진심인지는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기분은 나쁘지만 어쨌든 우리 기업들은 미국에 투자해야 하는 처지다. 트럼프의 관세 압박이 두려워서만은 아니다. 어차피 미국에 시장이 있고 혁신 파트너가 있다. 신(新)냉전 시대 미국 중심 공급망에 올라타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재명 대통령 스스로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 마당이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반드시 성공해 3500억달러의 대미 투자가 수익이 돼서 돌아올 것으로 믿는 수밖에 없다.
진짜 걱정은 국내 일자리다. 20여 년 전 우리 기업의 대중국 투자가 본격화할 당시 최대 공포는 ‘제조업 공동화’였다. 되돌아보니 기우(杞憂)였다. 국제통상학회장인 허정 서강대 교수가 최근 진행 중인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 투자가 집중된 2000년대 초중반, 해외에 투자한 우리 기업은 국내 투자도 줄이지 않았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국내에서 공장 한 곳을 폐쇄하면 1.07곳을 새로 지었다. 저부가가치 공장은 중국으로 보내고 고부가 중간재는 한국에서 만들어 중국에 수출했다.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다. 미국 투자가 급증한 2018년부터 2023년 사이 한국 다국적 기업들은 국내 공장 한 곳을 없앨 때 0.54곳을 신설하는 데 그쳤다. 참고로 해외에 투자하지 않는 ‘비(非)다국적 기업’들은 두 기간 모두 공장 폐쇄율이 설립률보다 훨씬 높았다. 허 교수는 “과거 중국 투자 집중기엔 전반적인 제조업 고용 감소를 다국적 기업들이 어느 정도 방어했지만, 미국에 투자가 집중되는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는 제조업 고용이 지난달까지 14개월째 줄어든 것이 단순한 경기 침체 때문은 아니라는 걸 뜻한다. 한·미 통상 협상에서의 약속대로 3500억달러 대미 투자가 집행되기 시작하면 국내 제조업 일자리 감소 속도가 더 가팔라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쉬었음 청년’의 숫자가 매달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는 게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안 되는 상황에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우리 정부의 태평함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최근 한국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대미 투자로 인한 제조업 공동화 우려’에 대해 “협력업체들은 여전히 국내에 남고 연구개발(R&D)센터 등 핵심 기능도 국내에 남기 때문에 그렇게 보긴 어렵다”고 했다. 전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러는 사이 거대 여당은 고용시장을 더 경직시키는 입법을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통과된 날 로봇주가 급등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창출, 아니 방어해야 할 고용노동부는 급기야 부서 약칭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꿨다. 플랫폼 노동자 등 고용되지 않은 노동 약자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게 고용시장 밖 노동 약자는 더 늘어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