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포에서는/사람은 절망을 만들고/바다는 절망을 삼킨다/성산포에서는/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 11 절망')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를 비롯해 섬에 관한 시집 여러 권을 펴내 '섬 시인'으로 불린 이생진(李生珍) 시인이 지난 19일 오전 6시께 세상을 떠났다고 고인의 제자 현승엽씨가 20일 전했다. 향년 96세.
1929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산농림학교와 국제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다. 1954∼1993년 성남중과 보성중 영어 교사로 일했다. 1955년 시집 '산토끼'를 펴내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바다와 섬을 좋아했다. 칠십여 년 동안 1천 곳이 넘는 섬을 찾아다니며 섬사람들의 애환을 시에 담았다. 2001년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인연으로 제주도 명예 도민이 됐다. 2009년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우뭇개 동산에 '이생진시비공원'이 만들어졌다. 2012년에는 신안군 명예 군민이 됐다.
92세 때인 2021년 '나도 피카소처럼'까지 시집 40권을 냈다. 92세에 세상을 떠난 파블로 피카소(1881∼1973)에 관해 쓴 연작 시집이다. 피카소에 관한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후, 피카소에 관한 온갖 책들을 찾아 읽고, 작품 전시회마다 찾아 다니며 시를 썼다. 당시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피카소의 인생이 더 길었다면 그만큼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 같다. 나도 가능하면 오래 시를 쓰고 싶어서 운동을 철저히 한다”며 오전 3시에 일어나서 시를 한 편 쓴 뒤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서 인근 도봉산 자락을 1만5천보씩 걷고, 매일 5분씩 물구나무를 서고 팔굽혀펴기와 철봉 운동도 한다고 소개했다. 문예지 '시와 시간들' 올해 가을호에도 시를 발표할 만큼 최근까지 시작 활동을 계속했다. 윤동주 문학상(1996), 상화시인상(2002)을 받았다.
'가난한 시인', '나도 피카소처럼'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난한 시인이 펴낸 시집을/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는다/가난은 영광도 자존도 아니건만/흠모도 희망도 아니건만/가난을 시인의 훈장처럼 달아주고/참아가라고 달랜다/저희는 가난에 총질하면서도/가난해야 시를 쓰는 것처럼/슬픈 방법으로 위로한다/아무 소리 않고 참는 입에선 시만 나온다/가난을 이야기할 사이 없이/시간이 아까워서 시만 읽는다/가난한 시인이 쓴 시집을/가난한 시인이 사서 읽을 때/서로 형제처럼 동정이 가서/눈물이 시 되어 읽는다'(시 '가난한 시인')
'피카소는 열두 살 때/'나도 라파엘로처럼 그릴 수 있다'고 자랑했다/그것이 어린 피카소에게 화필을 넘겨준 이유이기도 하다/미술교사인 아버지가 그린 비둘기는 날지 않아도/아홉 살 아들이 그린 비둘기는 파닥였으니까/피카소는 아흔이 넘어서도/젊은 여인의 숨소리에 맞춰 붓을 놀렸다/아무나 할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닌데/사람들은 함부로 피카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시 '나도 피카소처럼')
유족은 1남2녀(이수현·이경희·이승일)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21일 오전 5시, 장지 경춘공원. (02)2072-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