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1933~1945년) 재임하고, 유일하게 4선을 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그는 첫 임기 내내 연방대법원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루스벨트는 1929년 대공황으로 망가진 미국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뉴딜’을 내세우며 취임 100일간 각종 경제법안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당시 윌리엄 험프리스 연방공정거래위원장은 뉴딜이 반기업적이라며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루스벨트는 6년의 임기 중 4년이 남은 그를 해임했다. 험프리스는 이에 반발해 해임 무효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대법관 9명 만장일치로 해임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같은 날 대법원은 루스벨트의 핵심 경제법안 2개에 대해 위헌을 선고했다. 이후에도 보수 대법관 5명, 진보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뉴딜 법안에 잇따라 5 대 4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루스벨트는 “대법관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분노했다.
1936년 60%의 득표율로 재선된 루스벨트는 의회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을 앞세워 곧바로 대법관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대법관을 늘려 보수 우위의 대법원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바꾸겠다는 심산에서다. 대법관들과 언론이 격렬하게 반대해 증원은 철회했지만, 결국 루스벨트는 대법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법관 9명 중 한 명이 마음을 바꿔 뉴딜 법안이 5 대 4 합헌으로 통과됐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 벌어질지 모른다.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국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이 사법부 개혁을 추진할 것이란 전망이 많아서다. 민주당에는 지난달 1일 대법원의 선거법 관련 판결로 쓴맛을 본 상황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어떻게든 사법부를 바꿔야 한다는 정서가 팽배하다.
김어준을 비롯해 진보를 자칭하는 인사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튜브 채널들도 민주당의 최우선 과제로 사법부 개혁을 들먹이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 선고 직후부터 줄곧 대법관을 늘려야 한다는 내용으로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하며 민주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의 대법관이 각각 131명, 124명인 데 비해 한국의 대법관 수(14명)는 너무 적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기다렸다는 듯 민주당은 대선 세부 공약에 대법관 증원을 포함했다. 당초 100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가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숫자는 제시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법관 증원으로 재판 지연을 해소하고 상고심의 국민 신뢰도를 제고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법관 증원과 같은 국가의 사법체계를 바꾸는 작업이 정략적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 법조계와 학계, 전문가, 국민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듣고,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충분한 기간을 두고 추진해야 한다. 제18·19·20대 국회에선 여야 동수로 사법개혁특별위원회를 꾸려 주요 사안을 논의했다.
민주당이 루스벨트의 사례를 참고해 대법원을 길들이는 수단으로 증원을 들고나왔다는 의구심도 든다. 법조계와 많은 국민은 민주당에 우호적인 대법관을 대거 임명해 입맛에 맞는 대법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로 사회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는 ‘정책 법원’ 기능이 상실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법관 수가 늘어남에 따라 대법원 결정과 판결의 권위가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 개혁은 여야의 충분한 협의와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하는 중대 사안이다. 무엇보다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법 개혁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