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극한 폭염을 계기로 중국 가전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 독일에선 중국 메이디의 이동식 분리형 에어컨 '포타스플릿'이 품절 사태를 빚었다. 벽을 뚫지 않고도 10분 안팎으로 설치할 수 있어 낡은 건물과 까다로운 외벽 규제가 많은 유럽 주거 환경에 들어맞은 덕이다. 독일 공식 판매가는 699~900유로였지만 일부 재판매 가격은 1500~5000유로에 이를 정도였다.
이동식 에어컨이 수백만원대를 호가할 만큼 중국 가전은 더 이상 싼 가격만 앞세우지 않는다. 현지 수요를 읽고 제품을 새롭게 정의하는 경쟁력 있는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내수 부진' 빠진 中가전…해외선 '현지화'로 돌풍
7일 업계에 따르면 중국 가전 산업은 안방 시장에서 거센 역풍을 맞고 있다. 지난해 각종 정부 보조금과 '이구환신(보상판매)' 효과로 가전 수요를 앞당겨 끌어오면서 올해 상황이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부동산 경기 부진이 겹쳐 가전 수요가 쪼그라들었다.
중국 동방증권 자료를 보면 지난 5월 현지 백색가전 내수 출하량은 에어컨 1200만1000대(-15%), 냉장고 354만8000대(-8.7%), 세탁기 318만5000대(-9.3%)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모두 감소했다. 중국 국금증권이 시장조사업체 오웨이윈망(AVC)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올해 618 행사(중국 상반기 최대 온라인 쇼핑 행사)에서도 컬러TV 판매량은 361만대, 매출은 153억위안으로 각각 9.3%·11.6%씩 줄었다. 에어컨도 판매량 1380만대로 13.4%, 매출 418억위안으로 13.8% 감소했다.
내수 판매량은 줄었지만 글로벌 무대에선 반대다. 전략의 방향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과거엔 저렴한 가격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최근엔 수출·고급화·스마트화로 승부를 걸고 있다. 내수 시장에선 저가 제품들이 서로 가격을 깎아 먹는 경쟁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다. 반면 해외에선 현지 기후·주거 환경·유통 구조에 맞춤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오웨이윈망이 내놓은 '2026 중국 고급가전 가치성장 백서'를 보면 지난해 중국 국내 가전 소매시장 규모는 스마트폰·PC 등 3C 제품을 제외하고 8932억위안으로 전년보다 4.3% 줄었다. 하지만 고급가전은 판매량·가격이 동시에 오른 유일한 제품군이다. 오웨이윈망은 중국 가전 시장이 8000억~9000억위안대 재고형 시장으로 안정화되고 고급화·스마트화 제품이 고가 가전 성장을 이끄는 'K자형 분화'가 굳어졌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들도 중국 가전의 체질 변화를 성장 요인으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NIQ는 올해 중국 대형생활가전(MDA) 판매액이 4~7%, 소형생활가전(SDA) 판매액이 3~6% 늘 것으로 전망했다. 온라인 판매 비중도 압도적이다. NIQ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중국 소형가전 매출 중 95%, 대형가전 매출 중 55%가 온라인에서 발생했다. 이는 신제품을 빠르게 검증하고 확산시키는 데 유리한 구조다.
中가전 '스마트화'로 매출↑…유럽향 수출 '폭발'
스마트화 역시 중국 가전의 화력을 키우는 핵심 축으로 꼽힌다.
시장조사업체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세계 스마트홈 가전 시장이 지난해 485억2000만달러에서 올해 547억7000만달러, 2034년 1668억3000만달러로 전망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14.94%에 달한다. 이 시장에서 아시아·태평양 비중은 지난해 45.18%로 가장 컸다. 특히 중국 스마트홈 가전 매출은 지난해 71억9000만달러였는데 전 세계 매출 가운데 14.81%를 차지한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 증권가의 시각도 최근 시장 흐름, 향후 전망과 일치한다. 선완훙위안증권은 올 하반기 가전 투자전략과 관련해 중국 가전 기업의 핵심 축을 △백색·흑색가전 △로봇·데이터센터 액체냉각·반도체 등 기술형 가전 기업 △청소가전 등 신소비 품목의 해외 진출 기업으로 꼽았다. 백색가전 선두 기업은 동남아, 남미, 중동·아프리카 등 신흥시장에서 장기 수요를 노릴 수 있다. 청소가전은 해외 침투율 상승으로 성장 여지가 크다는 분석이다.
수출 물량 추이를 보면 이 같은 변화가 감지된다. 동방증권에 따르면 지난 5월 중국 에어컨 수출은 758만대로 4.2% 감소했지만 4월 감소폭(12%)보다는 줄었다. 반면 냉장고 수출은 567만8000대로 23.1%, 세탁기 수출은 445만대로 11.7% 늘었다. 냉장고는 오마 126만대, 메이디 100만9000대로 각각 25.5%·38.6%씩 증가했다. 세탁기는 하이얼 97만3000대, 메이디 86만8000대, 하이신 54만5000대로 각각 16.9%·10.7%·51.2% 증가했다.
유럽 냉방가전 수출도 다르지 않다. 중국 경제매체 21세기경제보도는 해관(세관) 데이터를 인용해 올 상반기 중국의 '대 EU 에어컨 수출액'이 37억6000만달러로 전년보다 43.2% 늘었다고 전했다. 올해 1~5월 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로 향한 중국산 에어컨 수출액은 각각 두 배 이상 늘었고 스페인·독일도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유럽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약 20%에 그치는 반면 현지 생산능력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다. 특히 서유럽으로 향한 중국산 이동식 에어컨 수출량은 올해 1~5월 70% 넘게 늘었다.
NIQ는 중국 브랜드가 국제 소형가전 시장에서 혁신을 앞세워 점유율을 키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형가전에서도 가격 경쟁력을 기반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고 봤다. NIQ 조사를 보면 지난해 상반기 중국 브랜드의 전 세계 소형가전 판매 점유율 증가율은 40.1%, 대형가전은 23.5%로 나타났다.
가전 소비자들은 갈수록 스마트 편의성, 다기능, 에너지 효율, 건강·위생 기능을 갖춘 제품에 지갑을 여는 추세다. 중국 가전의 경쟁력도 더는 '싸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저가 공세에 제품 기획력, 온라인 유통 속도, 고급화 전략, 스마트홈 생태계로 무장하면서 경쟁 브랜드들을 압박하고 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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