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은 거울 속 비친 이미지나 그러한 기능을 하는 타인의 육체의 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내가 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알게 될뿐만 아니라 타인의 욕망 그 자체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는다고 한다.
경제학에도 포모, 베블런 효과, 스놉 효과, 밴드왜건 효과처럼 많은 용어가 있다. 네트워크 효과는 타인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 우리는 혹시 다른 사람이 건네준 이상과 꿈을 뒤쫓으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자아를 찾아가는 인생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타인의 욕망을 갈구하고 그 욕망을 충족하면 허무함이 앞설 것이다. 자본주의에 윤리의 빛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적나라한 인간 시장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부의 축적의 정당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 윤리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계급투쟁의 살벌한 싸움터로 변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더 좋은 제도가 나타나기까지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영화로 보자. 영화는 도덕이 해이해지고, 재즈가 유행하고, 불법이 난무하며 주가는 끝없이 치솟았던 1922년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관련 예술가=F. 스콧 피츠제럴드(하루키가 사랑하는 20세기 미국 대표 작가)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부자들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환상과 배신 그리고 타락해버린 꿈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가난한 농업노동자의 아들이었던 개츠비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첫사랑 데이지와 멀어진다. 그녀는 결국 개츠비를 기다리다 35만 달러짜리 진주 목걸이를 선물한 톰 뷰캐넌과 결혼하게 된다.
이에 개츠비는 자신의 초라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종전 이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동안 데이지는 톰 뷰캐넌과의 사이에서 딸아이도 갖게 된다. 개츠비는 억만장자 댄 코디의 비서가 된 후, 그가 죽자 한 유대인과 사업을 해서 큰돈을 만진다. 밀주 제조와 금융사기 등의 온갖 불법 수단으로 거부가 된다.
1920년대 재즈의 시대라 불리던 이때는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큰돈을 만지는 것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금주법이 발효되자 밀주는 큰 돈벌이가 됐다. 1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엄청난 돈이 유럽에서 밀려왔다. 라디오 등 각종 신기술은 속속 산업화됐다. 주가는 기록적으로 폭등했다. 월스트리트는 호황을 누렸다.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에서는 밤마다 광란에 가까운 파티가 열린다.
초대받은 누구나 공짜인 이 성대한 파티를 개츠비가 연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옛 연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직 그녀와의 재회를 꿈꾼다. 그렇게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계속 노를 저어가며, 끊임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는 파티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혹시 방문했을지도 모르는 데이지의 모습을 찾는다.
끝없이 신분 상승을 꿈꾸고 그를 통한 데이지와의 재회를 꿈꾸는 개츠비의 대사가 귓전을 울린다.
“나의 삶은 저 빛처럼 돼야 해. 끝없이 올라가야 하지(My life has got to be like this, it's got to keep going up).”
개츠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는 그 불빛을, 그 격정의 미래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이 달아났어도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려서 다시 양팔을 내뻗으면 되는 것이다.
개츠비는 옆집의 닉 캘러웨이를 친구라 부르며 데이지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한다. 마침내 개츠비는 5년이란 시간이 흘러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의 사랑을 확인한다. 데이지는 바람둥이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회의를 느낀 지 오래고(데이지의 갑부 남편 톰은 정비공의 아내와 은밀한 사이였다), 개츠비의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데이지뿐이었다.
개츠비의 집에서 밀애를 즐기던 데이지는 돌연 힘겨운 표정으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고? 아니, 되돌릴 수 있어!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겠어! 모든 걸 예전처럼 돌려놓을 거야. 당신과 나 둘이서.” 하지만, 개츠비는 데이지의 사랑에 모든 것을 던졌다가 결국 파멸에 봉착한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이 개츠비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 돈을 벌었다는 것을 폭로한 것이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기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멀리한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배신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 유한계급의 안락한 삶 속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미 상류 사회에 익숙한 데이지에게 사랑 하나만을 갈구하는 개츠비는 크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한편 톰은 개츠비와 한바탕 다툰 후 뉴욕에서 롱아일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바람을 피운 머틀을 치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틀은 자신의 불륜을 눈치챈 남편 윌슨과 다투다 도망 중인 상황이었다. 톰은 윌슨에게 머틀을 친 차가 자신의 차가 아니라고 하며 개츠비의 주소를 알려준다. 윌슨은 개츠비의 집을 방문하고 그를 죽인 뒤 자살한다.
개츠비가 죽자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토록 많이 몰려왔던 파티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데이지도 오지 않았다. 이런 질문을 해본다. 개츠비의 사랑은 순수하였기에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인가? 혹시 그에게 데이지는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유한계급의 상징이었던 것은 아닌가? 파멸은 개츠비와 같은 개인에게만 닥친 것이 아니었다. 광란의 1920년대는 결국 대공황으로 막을 내렸다. 오늘 우리는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살기보다는 자아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자가 된 청년 개츠비의 이름을 딴 ‘위대한 개츠비 곡선’을 생각해 보자. 가난했던 개츠비는 남의 여자가 된 여인을 만나려는 욕심에 ‘위로 더 위로’ 올라가려고만 했다.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현대 사회에도 많은 사람은 개츠비처럼 부를 이루어 계층 이동을 꿈꾸나 소득불평등이 고착화돼 계층 상승은 어려워졌다.
소득불평등이 심하게 되면 자포자기하고 사회적 갈등도 심해져 사회적 비용은 커지고 경제 발전도 저해된다. 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으로 활력을 잃은 사회가 되기에,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시키려 하는 노력은 그래서 필요하다. 여하간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에서 X축은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이고 Y축은 부모의 소득에 따른 계층 간 소득 탄력성을 나타낸다. 부모 소득에 따라 자식의 소득이 변화할 수 있는 계층 이동 가능성을 표시한다. 지니 계수는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소득분배지표로, 0에서 1 사이의 수치로 표시한다. 지니 계수가 0이면 완전 평등한 상태이고, 1이면 완전 불평등한 상태를 의미한다.
중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일수록 이 값이 높아져 (X값과 Y값이 상단에 위치) 부모 잘 만난 친구가 잘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럽 선진국일수록 이 값이 낮아 상대적으로 부모의 소득에 영향을 덜 받는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의 중간 정도에 있는 미국을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졌다지만 실리콘밸리나 월가가 상대적으로 기회의 땅으로 인식된다.
불평등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양극화는 어쩌면 해소하려고 하면 해소할수록 더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케인즈학파 경제학자 칼도(Nicholas Kaldor)는 <칠레의 경제 문제>(1959)라는 글에서 칠레의 고소득층이 만일 선진국 부유층의 소비행위를 모방하지 않았다면 칠레의 저축은 두 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투자자본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위해서 부자에게 유인을 줘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현대 사회에서 부자는 생산 측면에서 기술 투자·생산성 증가·일자리 창출을 위한 자본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부자의 저축 없이는 경제를 확장하게 할 자금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개츠비처럼 가난한 자였다가 부자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시대에 부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위의 지도는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자산가들의 유입과 유출의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상속세나 세율 문제로 많은 국가의 부자들이 모국을 떠나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 작동하는 나라이면서 부자들이 떠나지 않는 미래 한국을 그려 본다. 물론 부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어야 부자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업가는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니다. 혁신과 변화만이 유일한 살길인 급박한 상황에서 부를 일군 기업가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다만 개츠비처럼 좋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벌고 파멸에 이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원경 UNIST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