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서도 영화시장에 드리운 불황의 그늘이 좀처럼 걷히지 않고 있다. 대체로 설 연휴 전까지 비수기인 1월 극장가 특성상 이렇다 할 흥행작이 보이지 않는다. 비상계엄 사태로 지속되는 정국 혼란과 무안 제주항공 사고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가 영화관을 찾는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개봉 당시만 해도 1000만 기대작으로 꼽혔던 <하얼빈>마저 최근 하루 관객 수가 3만 명대로 줄었다. 우민호 <하얼빈> 감독이 최근 아르떼 인터뷰에서 “극장을 찾아주는 분들이 신기할 정도로 줄었다”고 진단했을 정도다.
상업영화들의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반가운 건 독립·예술영화의 선전이다.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누적관객 수를 늘려가는 영화 ‘서브스턴스’와 ‘러브레터’가 대표적이다. 따끈한 신작과 오랜만에 만나는 재개봉작이란 차이는 있지만, 데미 무어와 고(故) 나카야마 미호라는 걸출한 주연 여배우와 씨네필들이 쌓은 추억의 힘이 흥행을 이끈다는 점은 같다.
“끝나지 않았다”는 데미 무어, 상영관 확대한 ‘서브스턴스’
15일 영화계에 따르면 영화 <서브스턴스>가 개봉 6주차인 이날부터 상영관 좌석 수를 5만2000석까지 늘린다. 지난달 11일 개봉할 당시 6만6000여석 규모였던 좌석 수는 4주차에 1만6000석까지 감소했지만, 다시 상영관을 확대한 것이다. 독립·예술영화뿐 아니라 상업영화까지 범위를 넓혀도 뒷심이 떨어지는 시기에 전국적으로 확대 상영을 하는 건 이례적이다.
<서브스턴스>는 ‘아트버스터’(예술영화+블록버스터)라 부를 만큼 기대 이상의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전날까지 누적 관객 수가 21만1594명으로 <퍼펙트 데이즈>(13만)는 물론, 지난해 개봉한 독립·예술영화 누적관객수 1위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20만7115명)마저 제쳤다. 이번 확대 상영도 2030 여성층을 중심으로 관람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결정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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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의 국내 흥행은 최근 골든글로브 수상의 영향도 적잖다. 더 젊고, 아름다워지려다 약물에 중독돼 망가지는 주연을 맡은 데미 무어는 지난 6일(한국시간) 미국 LA에서 열린 ‘제82회 골든글로블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데미 무어는 할리우드를 수 놓은 특급 미녀 배우 중 한 명이지만, 배우로 상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주가 제게 ‘넌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는 수상소감이 국내 언론을 통해 조명되면서 흥행에 탄력을 받은 것이다. 최근 내실 있는 ‘똘똘한 한 편’을 선호하는 극장가 트렌드에선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검증된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질릴 틈 없는 나카야마 미호의 아홉 번째 “오겐키데스카”
겨울 영화 하면 떠오르는 <러브레터>도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상단을 장식하고 있다. 지난 1일 개봉한 이후 전날까지 2주간 6만7000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개봉 첫날엔 좌석 판매율이 42%로 이날 전체 영화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검증된 영화적 완성도와 예술성에 리마스터링 등 때깔까지 고와진 ‘선명한 클래식’ 재개봉작들이 강세인 요즘 극장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란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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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일본에서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한국에서만 9번째 개봉하는 영화다. 매번 재개봉할 때마다 반복해서 보는 회전문 관객들이 많았지만, 이번 개봉은 보다 특별하게 와닿는단 반응이 많다. <러브레터>가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아련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자세히 뜯어보면 죽음에서 삶으로 향하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란 점에서다. 안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최근 사회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영화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를 외쳤던 주연 배우 나카야마 미호에 대한 추억으로 관람하러 간다는 관객들도 많다. 재개봉을 앞둔 지난달 6일 나카야마 미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한 영화제작사 관계자는 “상징적인 배우의 삶은 영화의 흥행에도 영향을 준다”면서 “영화를 봤던 관객들은 나카야마 미호를 기억하면서, 보지 않았던 관객들은 예전 모습이 궁금해 관람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