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출신 창업가 목소리
금전적 지원은 늘어났지만
과정 간소화·컨설팅 등 필요
“석·박사들에게 매달 80~100만원 더 준다고 이공계에 남을까요? 그보다는 이 연구에 매진해서 사업화하면, 국익에도 도움이 되고 개인적인 보람과 충분한 돈까지 가질 수 있다는 ‘창업의 꿈’을 심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공계 출신 창업가들은 정부 대책이 실제로 도움이 되려면 보다 세심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복잡한 행정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을 넘어 초짜 사업가의 시행착오를 줄여줄 도움이 절실하다는 이야기다. 단순 자금만 지원해서는 안되고 컨설팅과 네트워킹, 인재 관리까지 아우르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작년 대학 진학률은 72.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창업보다 취업을 택하는 것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의 벽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부산대 공대를 졸업한 이성현 글루리 대표는 현대자동차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가 사내 벤처를 통해 창업한 케이스다. 대기 중 온실가스를 제거하기 위해 사용자가 정해진 걸음수만큼 걸으면 직접 기를 수 있는 식물 키트를 주는 ‘포레스텝’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운영중이다.
21일 이 대표는 “현대자동차에 근무할 당시 청각장애인을 위한 주행보조 시스템을 개발하며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면서도 “정부도 나름대로 창업 지원을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인원이 적은 스타트업 입장에서 아무리 좋은 지원 사업이라도 신청서류 등 과정이 너무 복잡했다”고 토로했다.
복잡한 행정절차는 ‘소수 정예’로 일하는 스타트업에게 과중한 가욋일이다. 보행 로봇 제조 스타트업 라이온로보틱스의 지광현 프로는 “아직 로봇 산업은 시작 단계이고 보행로봇 관련 취업 시장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창업이 더 매력적인 선택지였지만, 안정적인 자본이 사업을 수행하는데 얼마나 필수적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초기 자본에 다양한 정부 과제 사업이 도움이 됐다”면서도 “다만 서버 PC환경을 세팅하거나 로봇 기술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센서를 갖추는 등 여러 장비가 필요한데 구매요청서를 작성하며 물품을 구매하는 이유를 상세히 과제 목적에 맞게 기록하고, 받은 물품을 포장 박스 사진과 개별 물품 사진으로 나누어 증빙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라이온로보틱스는 범부처 합동 ‘도전! K-스타트업 왕중왕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정부 지원을 받았고, 덕분에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 유치까지 받는 등 사정이 나은편인데도 이렇다.
산업 유형별 컨설팅과 구인난 해소 등도 젊은 창업가들이 절실히 지원을 요청하는 부분이다. 카이스트 생명화학공학과 대학원생 재학 시절 수전해 스택(물을 분해해 수소를 생산하는 장치) 제조업체 하이드로엑스팬드를 창업한 김민규 대표는 “인공지능(AI) 등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인 인식이 긍정적으로 갖춰지기 시작했고,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는데 우리같은 제조업 기반의 스타트업에서는 사람 구하기도 힘들다”며 “초기 기업의 인재 유치를 위한 금전적 지원이 늘길 바라는 것은 물론이고, 어려운 부분에 대해 컨설팅 기회를 더 받을 수 있으면 긍정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 프로 역시 “특히 양산을 위한 스케일업 단계에 도달하면 금형을 만들거나 공장을 세우는 등 많은 자본이 필요한 시점이 되는데 생산 시설 등에 한번 잘못 투자하면 손해가 커서 조심스럽다”며 “이러한 시기에 기술적인 컨설팅이 잘 이루어진다면 금전적 지원만큼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창업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늘어나고는 있다지만, 의대 증원 등으로 뒤숭숭한 이공계 분위기도 느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스타트업 대표는 “솔직히 정년 없이 안정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니 공대를 그만두고 N수를 해가며 의대에 간다는 공대 후배들을 나쁘게 보지도 못하겠다”며 “대학 연구개발 예산 줄이며 대기업 취업이 가장 나은 길로 보이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창업에 뛰어드는 인재도 줄어들까 걱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