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과 먼지가 없는 우주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발사체 회사의 기술 개발로 왕복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져 ‘우주 제조’ 시대가 현실화하는 것이다.
미국 반도체 제조사인 유나이티드세미컨덕터스는 지난 3월 우주정거장인 스타랩의 공간을 빌리는 계약을 체결했다. 스타랩은 보이저테크놀로지스 자회사 스타랩스페이스가 제작하는 팽창식 모듈 우주정거장으로 2029년 스페이스X에 실려 발사될 예정이다. 유나이티드세미컨덕터스는 저궤도 우주에 반도체 제조 시설이 구축되면 미세중력 환경과 진공 조건을 활용해 초고품질 반도체 결정을 생산하고 기판을 제조할 계획이다.
영국 우주 제조 스타트업인 스페이스포지도 올해 초 자사 상업용 위성 포지스타-1에서 반도체 공정의 핵심 조건인 고온 플라스마 환경을 세계 최초로 구현했다고 밝혔다. 반도체 공정 환경이 저궤도 우주에서 작동한 첫 사례다.
우주에서 만든 물질을 지구로 가져오는 회수 인프라도 커지고 있다. 미국 바르다스페이스와 호주 서던런치는 2028년까지 우주 제조 캡슐 20기를 대기권에 재진입 및 착륙시키는 계약을 맺었다. 우주 제조에 필요한 ‘귀환 물류망’이다. 우주에 제조 공간이 갖춰지고, 물품을 보내고 받는 환경이 구축돼 ‘스페이스 칩’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반도체는 원자의 규칙적인 결정 위에 회로를 새겨 만든 전자 부품이다. 지구에서 결정을 키우면 중력과 공기 때문에 대류와 침전 등 불균형 유발 현상이 생긴다. 우주의 미세중력과 진공 환경을 활용하면 지구에서 생산한 것보다 훨씬 깨끗한 초고품질 반도체 결정을 만들 수 있다. 우주 제조 반도체 스타트업인 베스사르의 애슐리 필리피신 최고경영자(CEO)는 “우주 자체를 클린룸으로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저궤도 빅뱅'…美·日 우주 반도체 개발 경쟁
우주 오가는 비용 크게 낮아져…반도체 밸류체인 대격변 예고
‘우주 경제’가 가능해진 건 스페이스X 등 발사체 기업의 등장으로 우주를 오가는 비용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우주왕복선 시절 로켓을 우주로 발사하는 데 ㎏당 약 10만달러가 들었지만 지금은 수천달러대가 소요된다. 스페이스X가 1단 로켓을 회수해 다시 쓰는 재사용 기술을 상용화한 덕분이다. 우주선 전체를 100% 재사용하는 스타십이 상용화하면 ㎏당 발사 비용이 100달러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우주로 반도체 원료를 보내는 비용이 지구 내 물류비 수준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지구의 밸류체인에서 반도체는 완제품에 장착되기까지 약 4만㎞를 이동한다. 하지만 저궤도 우주정거장의 고도는 약 400㎞에 불과하다. 상업용 저궤도 우주정거장 추진, 발사 비용 하락 등으로 우주를 오가는 데 따르는 부담도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우주 제조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가장 큰 건 소재다. 결정 성장, 특수 소재, 박막, 고부가가치 기판 등 밸류체인의 앞단에서 우주 환경을 활용하고, 제품을 지구로 회수한 뒤 완성품을 생산하는 모델이 거론된다. 특히 질화갈륨, 탄화규소, 다이아몬드 등 특수 반도체 소재는 기업들이 앞다퉈 우주로 가져가려는 분야다. 전력반도체, 6세대(6G) 통신 장비, 고성능 레이더, 센서 등에 쓰여 품질 개선이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미국이 반도체 무대를 우주로 넓히려는 가장 큰 이유다. 미국은 스타랩 등 민간 상업용 우주정거장 건설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스타랩은 보이저테크놀로지스와 에어버스, 팰런티어 등 기업이 연합해 추진 중인 프로젝트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제조하는 ‘우주 공장’이 목표다.
커티스 힐 미국 항공우주국(NASA) 마셜우주비행센터 책임연구원 등은 2023년 11월 낸 백서에서 “지금까지 미국은 반도체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질 재료 발견·성장’ 분야를 등한시한 결과 모든 실리콘 결정질 기판을 아시아에 완전히 의존하게 됐다”며 “기술 군비 경쟁에서 미국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도체산업을 우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인 일본도 우주 반도체 산업을 향해 뛰고 있다. 화학회사인 레조낙은 미국 우주 인프라 개발업체 액시엄스페이스와 지난해 10월 협력관계를 맺었다. 우주의 미세중력과 저궤도 환경을 활용한 차세대 반도체 소재와 칩 패키징을 공동 연구하기 위해서다. 미쓰비시는 스타랩 우주정거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핵심 주주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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