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도 하나의 음악 … 토치로 鐵 그슬리며 악장 만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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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배 개인전 '운명의 조우'
용접을 미술로 끌어올린 대가
작은 철심 불로 붙이며 작업
철사의 접합을 '음표'로 보고
음과 음 연결하며 작품 구상
갤러리현대 10월 20일까지

'Involution'(1974) 갤러리현대

'Involution'(1974) 갤러리현대

한 알의 사과에서 시작하자. 높이와 넓이가 1m쯤인 이 사과는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철심의 연쇄적인 용접'으로 만들어졌다.

이건 단순한 사과의 재현이 아니다. 가느다란 철사를 토치로 녹여 붙였는데, 자세히 보면 외부 곡면의 바깥이 내부 곡면의 안쪽이 된다. 그 역전은 구체의 중심인 세 번째 중심 곡면에서 다시 반복된다.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반복적 형상인 것이다.

이 작품('Involution')의 출생연도는 1974년. 정확히 50년 전의 작업물을 곁에 두고 지난달 28일 만난 조각가 존 배(87·사진)는 "구(球) 안에 또 다른 구가 중첩된다.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안팎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조형성"이라고 설명했다.

철사 용접이란 독특한 작법으로 조각계에서 독보적 위상을 구축한 존 배의 작품이 관객을 만난다.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가 마련한 '존 배: 운명의 조우' 전(展)에서 작품 40여 점이 검은 침묵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존 배의 작품 세계는 음악과 친연적이다. 거친 철사의 접합을 마치 악보 음표들의 집합으로 보고 조각을 하나의 음악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언급한 작품 'Involution' 점(点)의 연속이란 사색적 결과다. 음악의 본질이란 '하나의 음과 다음 음이 만나 구성되는 악장의 연속'인데 그에겐 용접도 다르지 않다. 철심과 철심을 연결하면서, 그 점들은 하나의 시각적 음(音)으로 귀결된다. 그는 "나는 내가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중요한 건 시간과 음을 넘어서는 공간과 점"이라며 "음악의 리듬처럼 용접 역시 서로 대화하는 음악, 시각적인 대화"라고 작품 세계를 집약했다.

사진설명

강인하지만 언젠가 녹슬기 마련인 철이라는 물성, 불로 고체를 액체로 만들었다가 다시 굳히는 연금술적 과정, 그리고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양철학의 순환적 세계관까지 감지된다.

존 배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는 특별하지 않다. 철심은 시중에 파는 것들이고, 용접용 막대도 용접공들이 자주 쓰는 베서머(Bessemer) 막대다. 베서머 막대란 구리 코팅이 된 철 막대를 뜻한다.

구순을 바라보는 작가는 눈을 보호하는 검은 고글을 쓰고 토치로 '철의 연금술'을 시도한다.

문제는 작품의 주재료가 산화에 약한 철이라 부식되기 쉽다는 점이다. 존 배 작가는 "용접 막대의 구리 코팅이 녹을 방지하는 데 유용하다"면서도 "그러나 녹은 실망스럽지 않다. 강인하지만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녹이란 철재에 깃든 하나의 인간성"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작품 'Shared Destinies'에선 입체적인 부피감이 느껴진다. 견조한 비대칭적 구조물인데 겹겹이 둘러싸인 철심들의 연쇄적인 반복 때문인지 작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나는' 것만 같다.

특이한 것은, 작가 자신도 모든 작품의 '시작점(첫 용접 착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존 배는 "완성된 작품의 최종 모습을 상정하지 않은 채로 작업에 착수한다. 한 점에서 시작해 철과 대화를 하다보면 내가 욕구하는 무의식 형태가 나타난다"며 "그건 하나의 집을 짓는 일이자 공간적인 드로잉"이라고 덧붙였다.

70년에 걸친 존 배 작가의 예술적 여정은 아주 오래전 시작됐다. 일산에서 성장한 그는 12세 때 목사였던 아버지, 러시아 태생의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가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프랫 인스티튜트엔 순수미술 전공이 없었지만, 학교는 오직 그를 위해 순수미술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28세에 프랫 인스티튜트 최연소 교수로 임명된 그는 40년간 미국에서 학생들과 호흡하기도 했다.

이번 '운명의 조우' 전시엔 그의 초기작도 다수 진열돼 관객을 만난다.

1963년작 'Untitled'가 눈길을 끈다. 자동차와 기계의 부품을 용접해 만들어진 작품은 활을 들고 비상하는 궁술에 능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 아르테미스적인 활동성이 감지된다. 버려지고 낡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재료의 물성은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해 원대한 비상(飛上)을 만들어냈다.

"나는 조각 작품이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또한 조각을 하나의 물체, 제가 만들어가는 물체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나는 대화를 하고 싶다. 작품을 바라보면 그것만의 생명을 갖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그저 과정 중에 '참여'했을 뿐인 것처럼…."(영화 '블랙 스완'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와의 인터뷰에서. 존 배 모노그래프 'John Pai: Liquid Steel'에서 발췌)

전시는 10월 20일까지.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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