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 전주대 교수 ‘쇄미록’ 연구
“백성 생계 공유지 의존 절대적
유교 국가 사회적 안전망 돼”
“찰방(察訪·역참 담당 관리)은 사람을 불러다 꿩을 잡게 했다. 마침 산 중턱에 큰 노루가 풀 속에 자고 있었는데, 활 한 방으로 가슴을 뚫어 쓰러뜨렸다. 바로 잡아서 간은 날로 먹고 고기는 구워 두고 점심으로 먹었다.”조선 중기 오희문(1539∼1613)의 일기 ‘쇄미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팔자 좋은 양반이 사냥 나들이라도 나선 것 같지만, 이 글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이 이어지던 1593년 4월로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다. 그는 일기에 “굶주림이 점점 심해져 백성이 날마다 굶어 죽는다”며 “나도 머지않아 구렁을 메우겠지”라고 쓰기도 했다. 오희문 일가는 살아남기 위해 틈만 나면 물고기를 잡고, 꿩을 사냥하고, 나물을 뜯었다. 전란으로 농토에서 유리된 이들에게 누구의 소유도 아닌 산과 개천이 생존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오항녕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교수는 17일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 발표문 ‘일상과 피난, 그리고 공유지’에서 조선의 공유지인 산과 숲, 개천, 연못 등 이른바 ‘산림천택(山林川澤)’의 가치를 쇄미록을 통해 들여다봤다. 오 교수는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특히 전쟁이 발발한 1592년에 기아가 심각했는데, 산림천택에 기대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이듬해 농사를 짓고 의병에도 참여하면서 왜군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가 쇄미록에 주목한 건 들판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등 공유지에서 이뤄진 경제 활동이 통상의 사료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세(田稅)와 공물을 전세화한 대동세(大同稅)의 비율이 1 대 3인 것으로 미뤄 국가의 입장에서 공유지인 산림천택과 텃밭이 백성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답의 3배에 이른다고 봤다. 오 교수는 “전란이 아닌 평시에도 공유지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유지하는 바탕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왕조시대엔 모든 땅이 왕토(王土)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산림천택은 왕도 사사로이 가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관리에게 나눠줄 토지가 부족해지면 개간을 전제로 공유지를 떼어주기도 했다. 광해군 대에 들어서는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산 관리 관청) 등의 공유지 침탈이 잦았다.
오 교수는 “조선은 인조 이후 침탈을 제어하고 숙종 때는 제한하는 등 공유지를 보호했다”며 “귀족과 국왕이 공유지를 차지한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기존 조선의 경제 활동 연구는 사적 소유의 발달에 초점을 두고 이뤄졌기에 ‘유교 국가의 사회 안전망’이었던 공유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산림천택 같은 사회 안전망은 오늘날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