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송현동→안암동’ 이전 90년
“1934년 고려대 안암동 시대 개막은
1920년대 좌절됐던 ‘민립대학’ 꿈이
인촌에 의해 다시 빛본 역사적 사건”
“직원과 학생들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을 하고 교기(校旗)와 ‘보성전문학교’라는 간판을 앞세우고 열을 지어 신교사로 향했다.”1934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안암동에 지어진 새 교사(현 고려대 본관)로 이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인촌 김성수 선생(1891∼1955)은 세계인에게 내세울 우리 민족의 민립대학을 세우겠다는 포부로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다. 건축가 박동진(1899∼1981)에게 의뢰해 1934년 안암동 신교사(현 고려대 본관)를 준공했다.
“1934년 고려대의 안암동 시대 개막은 1920년대 좌절됐던 민립대학 설립의 꿈이 인촌 선생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19일 전화로 만난 한용진 고려대 근대교육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근대교육연구소는 최근 고려대의 안암동 이전 90주년을 기념해 ‘안암 90주년: 1920∼30년대의 보성전문학교’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대한제국의 황실 예산을 담당한 내장원경(內藏院卿)을 맡았던 이용익이 세운 황립 학교에서 시작됐다. 이후 이용익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해 사망한 뒤 이용익의 손주 이종호를 거쳐 3·1운동 민족대표였던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학교가 넘어갔다. 이후 구미 각국의 대학을 둘러보며 민립대학 구상을 다듬던 인촌이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고, 안암동 일대에 새 캠퍼스를 마련했다.고려대 캠퍼스 건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본관은 당시 흔하던 일제의 목조 건축과 달리 화강암이 사용됐다. 한 소장은 “건축가 박동진의 말처럼 일본 목조 건축의 유약성과 대비되는 화강암의 강인한 면모를 생각하면, 이는 민족 독립의 굳건한 의지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미국 듀크대의 배치와 건축 양식이 본관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고려대 본관은 1937년 준공된 옛 중앙도서관과 함께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으로도 지정됐다.
1938년 본관과 정문 사이에 트랙 필드 400m와 3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탠드를 갖춘 대운동장도 만들어졌다. 이는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딴 베를린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을 모델로 한 것으로, 동양 최대 규모였다. 한 소장은 “대운동장이 존재함으로써 대학이 단지 지성뿐 아니라 야성을 겸비할 수 있었다”며 “오늘날 고려대 캠퍼스의 근원이 되는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복고(復古)가 아니라 창신(創新)을 위한 원동력”이라고 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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