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고 무너져, 마침내 만개하다

2 days ago 4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파열된 심연, 존재의 결핍, 실존을 위한 몸부림

영감에 가득 차거나 비참함에 가득 차거나, 흔히 ‘멜랑콜리’는 이 양 끝의 상태를 오가며 ‘천재의 질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미 제목부터 메타포인,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Melancholia)>가 재개봉 상영 중이다.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하는 종말의 순간을 그리지만, 영화가 탐구하는 것은 거대한 재난이 아닌 인간의 내면이다. 한 개인의 우울과 세계의 종말을 병렬 배치하며 심리적 붕괴와 물리적 파멸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담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아주 인상적이다. 비범하게 들려오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사이로 드러나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모습은 매우 강렬한 우울함에 결박당한 모습이다. 특히 클로즈업된 저스틴의 텅 빈 눈빛과 표정은 그녀의 텅 빈 내면을 잘 보여 준다. 영화 속 무수한 메타포를 읽어내는 동안 어느새 관객은 멜랑콜리아 행성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우울의 시각적 형상화

작품 속 저스틴은 우울의 기운에 사로잡힌 뛰어난 예술적 영감을 지닌 카피라이터다. 영화의 1막은 종잡을 수 없는 극도의 우울한 기운에 싸인 그녀의 불안한 정신으로 인해 결국 파탄 나고 만 결혼식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내면의 어둠 속으로 침잠한 저스틴의 격렬한 우울은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닌, 세계를 인식하는 그녀의 방식으로 보인다.

2막은 지구로 돌진하는 멜랑콜리아 행성을 마주해야만 하는 저스틴과 언니 클레어를 비롯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과 태도, 심리가 주로 다뤄진다. 영화의 1막 내내 잠복된 우울과 폭발하는 우울을 오가던 저스틴은 누가 봐도 불안하며 이상하리만큼 기이한 모습이다. 그런데 지구의 파멸을 이야기하는 2막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오히려 절망이 아닌 담담함을 내보이며 차분해진다. 지구와 충돌하려는 멜랑콜리아 행성을 마주하는 저스틴이 내면적 위안과 안정을 얻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반대로, 이제껏 단단한 이성을 지닌 채 침착함을 유지하던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는 밀려오는 불안과 절망의 기운에 잠식당한다. 근접해오는 멜랑콜리아 행성을 서서히 인식하면서부터 현실 파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멜랑콜리와 대면한 것이다. 점점 평안해지는 저스틴과, 무너져 내린 클레어의 극명한 대비는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우울과 구원의 아름답고도 비극적인 공존

영화 중반을 지나, 멜랑콜리아 행성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월광욕’을 즐기는 저스틴의 모습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압도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과 하나 되어 행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가히 초현실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대개 우울의 감정과 기운을 떨칠 수 없음에 불안에 이르고,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극단의 감정을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씩은 겪게 된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멜랑콜리한 기운들은 특별하거나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 일상을 지나며 겪는 일련의 사건들과 시간 가운데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내 저스틴과 같이.

시들고 무너져, 마침내 만개하다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는 '우울'이라는 것을 세계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다. 멜랑콜리아가 가까워지자 저스틴은 오히려 가족을 보호하고 안심시키려 마법의 동굴을 만들어 그들을 다독인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닌,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구원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멜랑콜리아 행성의 모습은 두렵지만, 동시에 숭고하다.

저스틴은 우울의 끝에서 도달한 초월적 상태를 지니게 되었다. 영화는 인간의 감정과 정신 상태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감각적 현실을 그리며, 인간의 심연을 성찰한다. 철학자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우울을, 실존의 문제로 접근했다. 그의 시 각으로 바라본다면, 멜랑콜리는 영혼의 도약을 위한 기회이다. 맹렬하고 진지하게 멜랑콜리를 체험한 자만이 진리나 구원과 독대할 수 있다.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멜랑콜리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시들어 진리에 도달해 마침내 만개할 그대 인생아!

치열하게 숙고한 인간이 맞이하는 삶과 죽음의 기로는 오히려 미처 생각하지 못한 평안함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는 이미 세상보다 크기 때문이다. 주체할 수 없는 비참한 시간을 감내하며 스스로 기괴해지기까지 시들어가던 인생이 마침내 진리에 이르는 길은, 그것이 무엇이든 땅끝까지 깊은 심연을 지난 이가 발견하고 깨달은 어떠한 것일 수도.

우울, 불안, 절망을 자신을 쾌활하게 구원할 에너지로 승화할 수 있기를. 비참함을 이겨내고 더욱 풍성해진 영감으로 고귀한 멜랑콜리를 획득하기를. 인간의 유한성이 아닌,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무한성을 철저히 믿어보기를. 삶의 영감을 확보하는 멜랑콜리 사용법을 지혜롭게 익혀 그대 만개하기를.

이언정 칼럼니스트

[영화 '멜랑콜리아'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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