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낮, 스페인 전력 생산량의 60%가 불과 5초 만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이 생기고 말았는데요. 정확한 원인 파악엔 시간이 걸리지만, 전문가 의견은 하나로 모입니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전력망 붕괴 위험을 키웠다는 거죠. 스페인 대정전의 교훈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송승호 광운대 전기공학과 교수님이 도움말을 주셨습니다(본문에서 큰따옴표로 처리한 부분은 송 교수님 발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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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초 만에 15GW가 사라지다
화창한 하늘, 풍부한 일조량. 스페인은 태양광 발전에 최적화된 곳이죠. 스페인은 연간 전기 생산량의 40%를 태양광과 풍력 발전으로 채우는 재생에너지 선진국입니다. 특히 스페인 남서부 엑스트레마두라주는 이 나라 태양광 발전소의 40%가 몰려 있는 태양광 발전의 중심지였죠.그리고 4월 28일 유럽 역사상 최악의 대정전이 발생하면서 이 지역이 새삼스레 주목받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마비시킨 정전을 촉발한 장애가 바로 여기서 시작됐기 때문이죠.
①전날과 다름없이 화창했던 28일 낮. 전력 소비량의 60%가량을 태양광 발전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낮 12시 33분. 엑스트레마두라의 어떤 발전소에서 갑자기 심각한 발전량 손실이 발생합니다. 순간 출력이 거의 0으로 떨어지며 ‘탈락’한 거죠.
②그리고 1.5초 뒤, 또다시 비슷한 일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③약 3.5초 뒤, 프랑스 측이 스페인과의 전력 연결선을 차단해 버립니다. 전력망이 불안정해지자 그 여파로부터 보호하려는 조치가 자동으로 발동된 거죠. 그게 결정타였습니다.④심각한 주파수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전력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거죠. 이런 장애를 인지한 스페인 발전소들이 설비 보호를 위해 줄줄이 전력망에서 분리(탈락)됐고요. 순식간에 전력 생산량 60%에 해당하는 15기가와트(GW)가 사라져 버립니다. 스페인 전력 시스템이 붕괴된 거죠.스페인 전국은 물론 전력망이 연결된 옆 나라 포르투갈까지 대규모 정전이 발생합니다. 레드 일렉트리카는 이를 ‘국가적 제로(cero nacional)’라고 표현합니다. 일부 지역이 아니라 아예 국가 전체에 전기가 끊겨버렸다는 거죠.
대정전 미스터리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①맨 처음 왜 발전소가 갑자기 탈락한 거죠? ②이런 사고에 대비해 갖춰놓은 시스템은 왜 작동하지 않은 거죠?①번에 대한 답은 아직 모릅니다. 일단 그 발전소가 태양광 발전소일 가능성이 크긴 한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진 조사해 봐야 압니다. 일단, 기상 이변(이상 고온)이나 사이버 공격일 가능성은 없다는군요.
이 부분에서 이렇게 의혹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태양광 발전량은 날씨의 영향이 크니까, 해가 너무 쨍쨍 내리쫴서→태양광 발전량이 너무 많아져서→주파수 균형이 깨지고→보호 장치가 발동해 발전소가 탈락한 게 아닐까? 역시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들쑥날쑥한 태양광 발전은 매우 위험한 건가?!
예를 들어 그런 보호조치 중 하나가 ‘부분 단전’입니다. 2011년 한국에서 벌어진 9.15 순환 단전 사태를 기억하시나요? 초가을 늦더위로 에어컨 사용량이 늘면서 예비 전력량이 급감하자 정부가 순환 단전을 실시하면서 656만 가구에 전기가 끊겼었죠. 국민 여론이 뒤집어졌고,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경질되는 큰 사건이었는데요.
만약 스페인처럼 발전기가 탈락한다면? 그때도 부분 단전을 시행하면 됩니다. 전력 시스템 유지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균형이기 때문에, 생산이 줄면 소비를 강제로라도 끊어내야 하죠. 그럼 적어도 문제가 스페인처럼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요. 그럼, 왜 그런 체계가 작동을 안 했을까요? 스페인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이게 바로 이번 대정전 사태에서 ①번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미스터리인데요. 이 부분에서 태양광 발전을 포함한 재생에너지의 취약점이 드러납니다. 바로 ‘관성 없음’이죠.
‘관성 없음’의 위험성
물리학에서 관성이 뭔지 아시죠?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물체가 운동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 그걸 말하는데요(뉴턴의 운동 제1 법칙).갑자기 웬 관성이냐고요? 이게 바로 화력·원자력·수력 같은 재래식 발전과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발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기 때문입니다.
재래식 발전소는 모두 터빈의 회전력으로 전기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걸 아시나요? 석탄·원자력 발전소는 증기터빈, 천연가스 발전소는 가스터빈, 수력 발전소는 수력터빈이 돌아가는 회전운동을 이용해 발전기를 돌리죠.
뭔가 문제가 생겨서 발전소 보일러나 원자로 가동이 일시 중단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순간적으로 전압·주파수가 급변하면 설비 보호를 위해 발전소 가동이 일시 중단될 수 있는데요. 이때 발전용 터빈은? 관성이 있으니까 크고 무거운 터빈들은 한동안은 회전할 겁니다. 마치 커다란 팽이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점점 느려져서 결국 멈추긴 하지만요. 바로 이 관성 덕분에 설사 정전이 발생한다 한들, 발전량이 순식간에 0으로 떨어지진 않습니다. 덕분에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손쓸 시간을 벌 수 있죠.
만약 사고로 인해 발전소가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면? 곧바로 인버터는 전력 변환을 중단해 버리고요. 그럼 발전 출력은 즉시 0이 되어버리고 말죠(=탈락). 이건 0.01초도 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순간(수 밀리초)에 벌어지는 일이라 손쓸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즉, 주파수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려서 보호 시스템이 발동하는 상황에선 재생에너지 발전소가 한꺼번에 우수수 탈락해 버릴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재생에너지의 ‘관성 없음’ 특성이 이번 스페인 정전 사태를 키운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사고가 발생한 한낮 시간에 스페인은 유독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높았고(태양광 약 60%, 풍력 10%), 따라서 전력 시스템엔 관성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사고야 늘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 사고에 대처할 여유가 사라져 버린 거죠. “부분 단전 같은 보호 조치를 취하려고 해도 다만 몇초라도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여기서 이런 반응이 나올 법합니다. 역시 재생에너지는 불안하네. 괜히 블랙아웃 같은 대형 사고 날까 무서우니 하지 말자. 이미 스페인에서는 재생에너지 정책을 논쟁이 커지는 분위기라고 하죠. 2027년을 시작으로 2035년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한다던 스페인 정부 계획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지는 건데요.이에 대해 송승호 교수의 의견은 좀 달랐습니다. “물론 ‘100% 재생에너지로 가도 문제없어’라고 얘기하는 것도 무책임하지만, 그렇다고 ‘우린 하지 말자’고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하는데요.
“스페인은 (에너지 전환의) 모범사례로 관심 있게 봤던 나라인데 막상 이렇게 대정전을 겪는 걸 보면, 이번 정전 사태로 알 수 있는 건 이겁니다. 결국 전력 계통이 받쳐주지 않으면 에너지 전환은 힘들다는 거죠. 전력 계통에 대한 투자와 업데이트가 꼭 필요합니다.”
다만 예전에 설치돼 이런 기능이 없는 태양광 발전기가 너무 많죠. 그걸 다 업그레이드하자니 돈이 많이 들고요. 또 다양한 재생에너지 발전이 자꾸만 늘어나고 추가되면, 거기에 맞춰서 전력망 보호를 위한 시스템도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요. 이것 역시 다 투자와 돈의 문제입니다. 무작정 태양광 패널 많이 깔고, 풍력 터빈 많이 세운다고 에너지 전환이 되는 게 아니고요. 거기 맞춰 전력 계통(전력 생산자부터 소비자까지 연결하는 전 과정의 모든 설비)부터 완전히 재정비해야 하는 거죠.
그럼 그 돈,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걸까요? 결국 돌고 돌아 소비자 요금 또는 국민 세금에서 나가기 마련입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하는 것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작업이죠. “에너지 전환을 하면서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 맞지 않죠. 돈이 더 드는 건 맞습니다.”
한국은 사방팔방 어디와도 연결되지 않은 ‘전기에너지의 섬’ 같은 나라이죠. 그래서 스페인 대정전 사태를 보며 우리도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4월 28일 월요일 이베리아반도에 유럽 역사상 최악의 블랙아웃이 닥쳤습니다. 스페인 남서부 태양광 발전소(추정)에서 발전량 급감이 잇달아 발생했고, 그 여파로 도미노처럼 줄줄이 발전이 중단됐기 때문이죠. 불과 5초 만에 전기 생산량의 60%가 사라집니다.
-사고는 있을 수 있지만 왜 이렇게까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까요.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의 ‘관성 없음’을 지적합니다. 회전체인 터빈의 회전운동을 기반으로 한 재래식 발전과 달리, 재생에너지 발전은 인버터를 이용하죠. 발전기가 가동을 중단했을 때 터빈은 관성 때문에 회전을 이어가서 대처할 시간을 벌어주지만, 인버터는 0.01초 만에 바로 탈락해 버려서 불안정을 키웁니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선 전력 계통 전체에 대한 투자와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게 이번 사태의 교훈입니다. 발전 방식은 이전과 달라졌는데, 예전 시스템을 고집할 순 없는 거죠. 에너지 전환엔 돈이 드는 법입니다.
*이 기사는 5월 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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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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