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하고 존중하는 시민 키우는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기고/정근식]

2 days ago 7

정근식 서울시교육감

정근식 서울시교육감
“똑똑한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 선택을 거듭하는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세일러가 젊은 시절 매료됐던 질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선택을 설명하는 행동경제학 개념 가운데 ‘소유효과’가 있다. 자기 소유물, 즉 ‘내 것’에 대해선 실제보다 가치를 높게 매기는 경향을 말한다.

소유효과는 재화뿐만 아니라 신념이나 의견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어떤 의견이 일단 ‘내 것’이 되는 순간, 확신이 증폭되고 비이성적으로 집착할 때가 많다. 충분한 숙고가 없었던, 즉흥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갈수록 영향력이 확대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보만 노출해서 시민의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빚어진 갈등을 우리는 지금 생생히 목격한다. 사실과 논리로 뒷받침되지 않는 확신이 공동체를 위협하고 있다.

‘내 것’이 된 입장을 원점부터 돌아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서울시교육청이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 이유다. 이 프로그램에선 토론으로 우열 또는 승부를 가르지 않는다. 내 입장을 내려놓고, 상대 입장을 경험하게끔 하는 게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깨닫고, 다른 입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뜬다.

이는 이질적인 집단에 인지적 공감을 기르는 기회가 된다. 인지적 공감을 통해 우리는 동질적 집단 안에서 주로 작동하는 정서적 공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분절화한 사회에서 합의와 통합을 이루는 기초가 마련된다.

창의적 해석과 자유로운 주장이 얼마든지 허용되지만, 이는 반드시 사실과 논리에 기반해야 한다는 게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의 규칙이다. 토론 준비 과정에서 학생들은 참고 자료의 진실성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법을 배운다. 이 같은 팩트체크 역량은, 디지털 미디어 및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달 속에서 부정확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꼭 필요한 소양이다. 학생들이 왜곡된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 비판적 문해력을 갖출 때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도 낙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에선 나치즘에 대한 반성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근대 독일은 뛰어난 과학자와 철학자를 숱하게 배출했다. 많은 지식인을 낳은 독일인들이 왜 나치의 비이성적 선동에 동조했는지 등을 놓고 반성과 토론이 진행됐다. 또 한편으로는 동·서독 분단과 냉전에 따른 이념 갈등도 격화됐다. 이는 ‘다른 입장을 존중하며 스스로 성찰하는 민주시민을 기르는 교육’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보수와 진보를 각각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1976년 11월에 모여 민주시민 교육의 주요 원칙을 합의한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그 결과물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역시 보이텔스바흐 협약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극단적인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을 충분히 경험할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취지와 마찬가지로,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역시 보수와 진보의 구별 없이 도입돼야 한다. 올해 9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안건으로 상정해 전국으로 확산시키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이 더 똑똑해지기를 바라는 분들이 많다. 물론 학교는 학생들의 창의적인 지적 역량을 기를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똑똑한 이들이 무리한 확증 편향과 진영 논리에 빠져 공동체를 위협하는 일도 흔히 본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이 스스로 성찰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시민이 모여 건강한 공동체를 꾸려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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