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화통화는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한국시간 9일 오후 1시) 직전에 이뤄진만큼 의미가 남다르다는 분석이다. 한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은 8일 28분간 전화통화를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했던 통화(12분)보다 길다. 외교가에서는 이번 통화를 계기로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이후 얼어붙은 양국간 대화 채널이 복원됐다는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상대로 본격적인 ‘청구서’를 제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 외교통상당국의 대응이 관건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날 정부에 따르면 한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와 경제협력, 조선 관련 협업,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한 권한대행은 “미국의 새로운 정부 하에서도 우리 외교와 안보의 근간인 한미 동맹관계가 더욱 확대·강화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또 한 권한대행은 “조선과 액화천연가스(LNG), 무역균형 등 3대 분야에서 미국과 한 차원 높은 협력을 이루자”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미핵화에 대한 한미 양국과 국제사회의 의지가 강력하다는 것을 북한이 인식할 수 있도록 공조하자”고 제안했다. 한 권한대행과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계속해서 대북정책 관련 긴밀한 공조를 이어가고, 한미일 협력을 지속 발전시켜 나가자”고 뜻을 모았다.
이와 별개로 트럼프 대통령은 한 권한대행과 통화 직후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을 통해 “한국의 대통령 권한대행과 훌륭한 통화를 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 분야에 대해 논의했다고 언급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윤석열 전 대통령과 통화에서도 한국과 조선 분야 협력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우리가 한국에 제공한 대규모 군사적 보호에 대한 지불을 논의했다”며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한국)은 내 첫 임기 때 수십억 달러(수조원)의 군사적 비용 지불을 시작했지만,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했다”며 “그것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고 주장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방위비 분단금 재협상을 언급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과 미국은 미국 대선 직전인 지난해 10월 2026년부터 적용하는 방위비 분담금을 전년 대비 8.3% 인상한 1조5192억원으로 정하고, 2030년까지 매년 분담금을 올릴 때 소비자물가지수(CPI) 증가율을 반영키로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방위비 분담금 협정 문안을 타결한 바 있다.
한 권한대행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통해 미국 행정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집중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권한대행은 이날 CNN과 인터뷰에서도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에 대해 “맞서지 않고 협상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국이 미국과 맞서는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이런 대응이 한국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외교가에서는 이날 양국 통화가 끊어진 대화 채널의 복원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한·미 정상 간 소통은 지난 1월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78일 만이다. 이날 전화 통화는 외교 관례에 따라 통역이 이뤄졌지만, 일부 대화는 통역 없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관료 출신인 한 권한대행은 통상교섭본부장과 주미대사 등을 지낸 경험이 있어 영어에 능통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해 11월 7일 약 12분간 통화한 적이 있다. 당시 대통령실은 “조만간 이른 시일 내에 회동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한 달여 후 ‘12·3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양국 정상 외교는 올스톱됐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 권한대행은 지난해 12월 15일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과 통화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이 한 권한대행을 탄핵 소추하면서 트럼프 대통령과는 소통이 이뤄지지 못했다. 한 권한대행 직무정지로 대통령·총리직 대행을 이어받은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직접 소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