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자락에서 평범한 가정을 꿈꿨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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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두 달간 끔찍한 발작을 반복한 고흐는 자신의 병이 어떤 차도도 보이지 않자 크게 상심했다. 좀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감정을 담아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1890년 5월 중순 고흐는 요양원을 탈출했다. 다음 목적지는 파리에서 약 32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다. 그곳에는 폴 페르디낭 가셰(Paul-Ferdinand Gachet)라는 의사가 있는데 아마추어 화가이자 다른 화가들과 친했다. 이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과감히 그에게로 떠났다. 「가셰 박사의 초상」(1890)은 오베르로 이주한 지 한 달 후, 그러니까 죽기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이다.

가셰 박사의 초상과 한 가닥 희망

고흐가 오베르로 향한 건 테오의 추천 때문이다. 그 의사는 소문이 자자했다. 소식통이었던 동생은 "예술가를 이해하는 의사"라고 극찬했다. 4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당시 유명인이었던 마네, 르누아르, 세잔, 피사로 등을 포함한 전위 미술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보다는 그들의 크고 작은 행사에 쫓아다니며 쓸데없이 참석하고 입소문을 내주는 '대리만족'형 인간이었다.

막상 오베르에서 고흐가 직접 겪어본 가셰 박사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우선 의사라고는 하지만 치료자로서 전문성이 없었고, 고양이와 개, 그리고 새들로 가득한 마당에서 환자를 맞이했는데 늘 주위가 어수선했으며 정신이 산만하여 오히려 고흐 자신보다 더 문제가 있어 보였다.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r. Gachet)」(첫 번째 버전,1890년) / 개인 소장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r. Gachet)」(첫 번째 버전,1890년) / 개인 소장

고흐는 초상화를 즐겨 그렸지만 가셰 박사를 그린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상화만큼은 꼭 그려야 했다. 그림 속 가셰 박사는 탁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걱정 가득한 푸른 눈을 하고 있다. 탁자 위엔 디기탈리스 잎이 담긴 잔과 두 권의 책이 있다. 디기탈리스는 당시 뇌전증 치료에 쓰이던 약재였고, 이는 가셰 박사가 고흐에게 제안했던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한 치료 방법이었다. 또 두 권의 책은 공쿠르 형제의 작품 『제르미니 라세르퇴』와 『마네트 살로몽』인데, 이 책들이 이 초상화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준다. 하나는 도시에서의 병과 죽음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예술을 통한 구원이 주제였다.

고흐는 더 이상 자신의 증세가 회복되지 않자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며 절망감을 토로했다. 그는 테오와 요안나, 그리고 조카 빈센트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함께 가족의 유대감을 키우고 싶었다. 이제 남은 실낱같은 희망은 테오의 가족을 오베르로 데려와 자신의 새로운 가족으로 삼는 것이었다. 당당하게 그 의견을 밝히지는 못하면서도 오베르의 매력을 전하려고 했다.

이것을 위해 고흐는 가셰의 저택에서 작업하며 그의 자녀들과도 어울렸고,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테오에게 은근히 과거 자신이 꿈꿨던 가족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곳의 저녁 식사에 대해 "우리가 아주 기대했던 다정한 가족의 저녁 식사"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셰 박사의 초상은 고흐가 테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제안하는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r. Gachet)」(두 번째 버전,1890년)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of Dr. Gachet)」(두 번째 버전,1890년)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테오의 가족이 이 마당에 문득문득 떠오른 것은 요양원을 떠나 동생 집에 잠깐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여운이 이상하게 계속되었고 그들이 없으니까 더욱 허전했다. 특히 갓난아기가 요람에서 잠든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이 일었다. 또한 거실을 비롯한 방 구석구석에 자신이 그린 거의 모든 그림들이 가득했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10년간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동안의 열정과 고통, 그리고 테오의 지원을 떠올렸다. 사흘간 머물렀지만 자신에겐 운명적으로 허락되지 않았던 가족에 대한 행복감을 꿈꾸게 되었다. 그 누구보다 더 가족이 필요했던 고흐는 가셰의 초상화를 통해 동생에게 가족의 꿈을 넌지시 내비쳤다.

까마귀와 밀밭

마침내 테오가 가족과 함께 오베르에 들렀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또다시 고흐의 꿈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너에게 난 짐이 되고, 나에게 넌 떨어질 수 없는 가족일 텐데, 거리를 두는 것이 너무나 무섭다."

테오와 한 가족이 될 수 없었던 고흐는 더 이상 테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여관 2층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그의 인생 마지막 숙소가 되었다. 당시 느꼈던 감정적 소용돌이를 밀밭을 배경으로 캔버스에 담았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년)은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고독하고 광활한 밀밭이 넓게 펼쳐졌다. 캔버스의 가운데로 까마귀 떼가 뭔가에 놀라 하늘로 흩어져 날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작업하는 쪽으로 급습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1890년) © Van Gogh Museum, Amsterdam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1890년) © Van Gogh Museum, Amsterdam

이미 완성했던 여러 편의 밀밭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따뜻함과 평온함 대신 스산함과 쓸쓸함이 보인다. 모든 희망이 사리진 후 고흐가 느꼈을 감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밀밭에서 위로의 흔적과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흔히 이곳에서 작업 중에 고흐가 자신에게 총을 쏘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검푸른 하늘과 황갈색 밀밭에 불어오는 소용돌이 속에서 이 작품을 관람하는 자들은 죽음의 기운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흐에게 정말 죽음의 본능이 있었던 것일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죽음 본능을 프로이트는 '타나토스(Thanatos)'라고 했다. 타나토스는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함께 파괴와 죽음을 향한 본능인 타나토스를 가지고 있다. 특히 프로이트는 말년이 되어 타나토스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생명체가 자신의 근원인 흙과 같은 무생물의 상태가 되고 싶은 욕구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여한도 없이 정해진 수명만큼을 받아들이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장 19절)는 인간 본능을 말한다.

고흐는 밀밭을 그리려고 가로 길이가 세로 길이의 두 배에 달하는 긴 캔버스를 들고 언덕으로 향했다. 밀밭과 하늘의 경계를 길게 가로질러 거친 붓질로 표현했고,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도 없고 집 한 채도 찾아볼 수 없으며 교회의 첨탑 하나조차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벌판만 두었다. 밀밭 가운데로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외길만 이어져서 땅과 하늘의 경계선과 맞닿아 있다.

그림을 보면 가로로 길게 놓인 경계선과 세로로 굽은 길이 맞닿은 교점이 어느 순간 떠오르면서 마치 그 공간으로 까마귀 떼가 모여드는 착시를 경험한다. 어두운 밤하늘과 거친 밀밭, 까마귀 떼가 고흐를 불길한 어디론가 몰아가려는 듯하다. 그곳은 자연의 광대함 속에서 느껴지는 극단적인 고독의 장소인 것 같다. 고흐는 편지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삶의 뿌리가 위협받는다. 내 발걸음은 불안정하다."

고흐의 죽음이 자살인가 타살인가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가 사용한 총이 지역 소년 르네 세크레탕의 것이었으며, 사고 또는 타인의 가담 가능성도 제기된다. 짓궂은 소년 르네는 무모한 장난으로 고흐를 자극하며 갈등을 빚곤 했었다. 고흐의 삶은 동네 아이들에게까지 조롱과 괴롭힘을 당하는 쉽지 않은 삶의 연속이었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여전히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부모를 떠올리며

반 고흐 「오베르 교회(The Church in Auvers-sur-Oise, View from the Chevet)」(1890년)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반 고흐 「오베르 교회(The Church in Auvers-sur-Oise, View from the Chevet)」(1890년) © Musée d’Orsay, Dist. RMN-Grand Palais / Patrice Schmidt

고흐는 1890년 7월, 오베르에 이주한 지 두 달 만에 죽었다. 죽기 한 달 전에 불현듯 아버지를 추억하며 「오베르 교회」(1890년)를 그렸다. 원래는 볼품없는 탑을 지닌 커다란 석조 건물이었지만 마치 유리 궁전이 초원 위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건물의 복잡한 실루엣은 깊이 있고 선명한 청록색 하늘을 배경으로 하며 밝은 주황색 슬래브 조각 하나가 건물의 활기찬 분위기를 더욱 강조해 준다. 그 아래에 있는 두 갈래 길은 양쪽으로 갈라진 나뭇가지 같아서 교회의 모습은 마치 나뭇가지 위에 얹혀 있는 새 둥지 같다. 아버지가 목사였던 고흐는 어린 시절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자신의 독창적인 경험과 상상력을 반영하여 교회 건물을 기존의 건축 양식이나 디자인보다는 새 둥지와 같은 오손도손 따뜻한 가정으로 표현했다.

고흐는 1889년 9월 말, 서두에 이미 언급했듯이 생레미 요양원에서 연달아 발생한 발작으로 고통받았다. 바로 그때 어머니와의 관계를 새롭게 반영한 작품 「피에타(Pietà (after Delacroix))」(1889년)를 그렸다. 이전에 이미 들라크루아의 「피에타」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고흐는 엄마에 대한 집착에서 엄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피에타」를 그렸다.

반 고흐 「피에타(Pietà (after Delacroix))」(1889년) © Van Gogh Museum, Amsterdam

반 고흐 「피에타(Pietà (after Delacroix))」(1889년) © Van Gogh Museum, Amsterdam

고흐는 엄마에게 한 번도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고 미움만 가득했다. 비록 그동안 여러 편 그렸던 「아기 재우는 여인」(1889~1890)에서 삶에 너무나 지쳐 자신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으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늘 욕구 불만이었다. 그런데 「피에타」(1889년)에는 축 늘어져 있는 아들의 시체를 뒤에서 안은 어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이 눈물은 이미 고흐가 죽기 10개월 전에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했다는 증거로 남겼다. 고흐는 드디어 엄마의 전적인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관련 칼럼] 고갱을 향한 끝없는 집착··· 고흐는 그렇게 망상의 세계에 갇혀버렸다

고흐는 서른일곱 해 평생 부모의 사랑을 강하게 갈망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치유하려 했지만, 그 상흔은 너무도 깊어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죽음을 갑작스럽게 맞이하기 이전에 과거의 부모와 화해하고 그 사랑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오랜 시간 가슴에 남아 있던 아픔을 내려놓고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자정께, 그러니까 사고를 겪고 나서 이틀 만에 동생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가 쓰러지기 전까지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은 커다란 화구를 매고 자연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게 삶을 마주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의 섭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미 자신의 상처를 딛고 어린 자기와 화해하였기에 어떤 응어리도 없었던 까닭이다. 우리는 그가 내린 이 마지막 결정에 묵직한 침묵 속의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도 그동안 쌓아둔 상처를 해결하고 마지막 숨결이 폐부에서 간신히 휘돌아 나올 때 고흐처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

김동훈 『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민음사)

김동훈 『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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