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는 지금 총성 없는 기술 패권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반도체, 인공지능(AI), 우주항공, 에너지, 로봇을 선도하는 국가가 경제와 안보는 물론 산업까지 지배하는 시대다. 이공계 인재 부족이라는 구조적 위기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이 다음 세대까지 과학기술 강국으로 번영할 수 있겠는가는 현시점에서 어떠한 과학기술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선택의 분기점 중 하나가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를 내려놓는 것이다.
PBS 제도 폐지는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 대전환을 의미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연구자들에게 '연구에만 몰두할 자유'를 제공하고, 출연연이 국민 자긍심을 높이고 대형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국가대표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PBS는 1996년 도입 이후 30년 가까이 우리나라 R&D 제도 중심축이었다. 초기에는 경쟁체제를 유도해 R&D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긍정적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연구자는 창의적 도전 대신 과제 수주 경쟁에 내몰리고, 연구보고서 작성과 예산 정산에 매달리는 '프로젝트 관리자'로 변질되고 말았다.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이제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추격형'이 아닌 '선도형' 과학기술 전략이다. PBS 제도로는 이를 뒷받침하기 어렵다.
첫째, 연구자들이 창의적 사고와 도전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 몰입 환경이 필요하다. 제안서와 보고서에 매달리는 대신, 연구자들이 새로운 실험과 도전에 집중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출연연의 본질적 임무인 국가 산업을 바꿔놓을 수 있는 도전적 과제나 원천기술 연구 등 대형 연구 성과 창출이 필요하다. PBS는 단기성과 중심 3~5년짜리 과제를 선호하게 만들어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구조를 고착했다.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안전한 주제를 선호한 결과, 첨단 전략기술 분야에서 후발 경쟁국에 역전당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반도체, 양자, AI, 로봇과 같은 국가 전략기술과 차세대 산업 기술은 최소 10년 이상 장기 투자가 필요한 분야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국민이 감동하고 새로운 국가 먹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성과가 필요하다.
셋째, 국가 연구생태계 통합과 선도형 연구 문화 조성이 시급하다. 과학기술 발전은 융복합과 다학제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술 가치사슬이 재편되고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단위 연구조직의 과제 수주 경쟁만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출연연은 이제 각자도생을 넘어, 선도형 연구생태계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랜드 챌린지형 R&D, 다층적 R&D, 플랫폼형 R&D로 전환이 필요하며, 이는 PBS 체제 하에서는 달성하기 어려운 미션이다.
PBS는 한 시대의 역할을 다했다.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로켓 1단을 떼어내고 2단을 점화하듯 PBS를 내려놓고,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2단 추진체를 점화해야 할 때다. 새로운 제도는 단순히 기존 제도의 대체물이 아니라 더 큰 비전과 전략을 담아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외에도 △안정적 출연금 확대와 장기 프로그램 확충 △행정 간소화와 합리적 성과 평가 △역할 기반 보상 체계와 연구원 처우 개선 △실패를 용인하는 도전적 연구 문화 정착 등 조건이 추가로 뒷받침돼야 한다.
연구자는 과제가 아닌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더 이상 출연연 연구자를 '과제 따러 다니는 장사꾼'으로 손발을 묶어 둬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주권을 확고히 하고 세계 무대에서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제 과감히 PBS의 틀을 넘어 새로운 연구제도를 출범시켜야 한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 원장 seoghyeon.ryu@kim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