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는 이전에도 석유 공급 밸브를 확 열어서 치킨게임을 벌인 적 있죠. 혹시 이렇게 새로운 유가 전쟁이 시작되는 걸까요. 전 세계 산유국과 정유업계를 떨게 만드는 유가 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사우디의 기강 잡기
7일(현지시간)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61.12달러,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58.07달러에 거래를 마쳤죠. 배럴당 80달러 안팎이던 올해 초와 비교하면 넉 달 새 25%가량 급락했습니다. 2021년 초와 비슷한 수준으로 뚝 떨어진 겁니다.
세계 경제가 썩 좋지 않은 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공급을 왕창 늘린다? 이건 명백히 국제유가를 끌어내리기 위한 움직임이죠. 산유국 모임인 OPEC+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자고로 카르텔이란 가격을 끌어올리는 게 존재 이유인데 말이죠. 지금의 증산은 어디까지나 OPEC+ 리더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뜻인데요. 현재 표면적인 이유로 꼽히는 건 크게 두가지입니다.
①무임 승차자 응징지난 3년여 동안 OPEC+의 23개 회원국은 감산 체제를 유지해왔죠. 총 감산 규모가 600만 배럴에 달했고요. 이중 사우디아라비아는 가장 큰 200만 배럴의 감산을 해왔습니다. 유가를 높게 떠받치기 위해 나름 희생을 한 셈인데요.그런데 주요국 중에도 감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만성적으로 생산 할당량을 초과해 온 얌체 국가가 있었죠. 이라크와 카자흐스탄입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계속 새로운 유전이 개발되면서 올해 초 되레 사상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는데요.
지난 4월 두 번째 증산 결정 당시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인 압둘라지즈 빈 살만 왕자는 이번 조치가 “식전주(아페리티프·aperitif)”에 불과하다고 경고했죠. ‘너네 계속 말 안 들으면 생산량 더 늘린다!’는 협박이었고요. 5월 3일 세번째 증산을 결정한 온라인 회의에서 왕자는 1973년의 ‘석유 금수조치’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옛날에 더 힘든 시기를 견뎌냈잖아. 지금도 단결 좀 하자!’라고 강조한 거죠.
②트럼프에 잘 보이기
사우디의 이런 움직임에 흡족해할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 때부터 ‘휘발유 가격을 내리겠다’고 공약했고요.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선 “사우디와 OPEC에 유가 인하를 요구할 것”이라고 연설했죠. “유가가 떨어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바로 끝날 것”이란 논리였는데요.
이런 트럼프 대통령의 다음 주 중동순방을 앞두고 나온 OPEC+의 6월 추가 증산 결정. 타이밍이 참 절묘합니다. 사우디가 트럼프에 잘 보이기 위해 유가 하락을 이용한다는 분석이 나오는데요. 물론 OPEC은 이를 부인하지만, 사우디가 미국과 더 긴밀한 안보 협력을 추구하는 건 알려진 사실이죠.
아찔한 4차례 유가전쟁
사우디는 석유 매장량 세계 2위(1위는 베네수엘라), 생산량 역시 세계 2위(1위는 미국)인 나라입니다. 그런 사우디가 공급 폭탄 버튼을 눌러서 세계 원유 시장을 초토화시킨 적 한두 번이 아니죠. 다시 증산 시동을 건 사우디가 이번엔 어디까지 나아갈지, 업계가 초조하게 지켜보는 이유인데요.과거의 파괴적이었던 유가 전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1985년 11월~1986년 12월= OPEC 리더 사우디는 그때도 감산에 앞장서 왔고요. 그때도 나머지 OPEC 회원국들은 정해진 할당량을 지키지 않았죠. 사우디가 나 홀로 유가를 떠받치고, 나머지 회원국은 그 과실만 누린 채 고통 분담은 하지 않은 건데요. 그러자 사우디 파드 국왕이 ‘부담을 혼자 짊어질 수 없다’고 선언했고요. 곧이어 생산량 대폭 늘립니다. 배럴당 31달러 수준이던 유가는 7달러대까지 폭락하고 말았죠.
③2014년 11월~2016년 9월= 2010년대 들어 셰일 혁명에 힘입어 미국이 빠르게 석유 생산량을 키워가자, 사우디는 당황합니다. OPEC이 감산에 나서도 유가를 떠받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비OPEC 국가인 러시아에 협조를 구했지만, 러시아는 감산을 거부했고요. 이에 사우디 석유장관 알리 알나이미는 ‘유가가 20달러가 되더라도 OPEC은 생산량을 줄이지 않겠다’며 유가 전쟁 돌입을 선언합니다.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유가는 곤두박질쳤고, 2016년 초엔 30달러 선까지 깨졌죠. 이를 계기로 2016년 12월 러시아 등이 포함된 OPEC+가 결성됩니다.
④2020년 3~4월=가장 짧지만 강렬했던 유가전쟁입니다. 러시아와의 감산 협상이 결렬되자 사우디가 증산을 결정했고요. 하루 만에 유가가 25%가량 폭락했죠. 2020년 초 60달러였던 브렌트유 가격은 그해 4월 20달러선까지 떨어집니다. 마침 코로나로 수요가 급감하던 상황이라 충격이 유독 컸는데요. 결국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에 전화를 걸어 “OPEC이 감산하지 않으면 미국의 군사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유가 급락이 사우디·러시아·미국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치킨게임이 될 수 있어서였죠. 한 달여 만에 사우디와 러시아는 감산에 합의하며 전쟁을 끝냅니다.
미·러·사, 누구도 충격은 못 피한다
요약하자면 사우디는 필요하다면 유가 급락을 감수하고 증산으로 나아간 전례가 이미 있습니다. 말 안 듣는 OPEC 회원국을 응징하고 기강을 잡기 위해서, 또는 치고 올라오는 비OPEC 경쟁 산유국을 밀어내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사우디가 일단 유가전쟁에 불을 지피면, 그때마다 유가가 반토막 이상 날 정도로 파괴력이 엄청났는데요.사실 유가전쟁은 사우디 입장에선 제 살 깎아 먹기입니다. 사우디 정부 세입의 상당 부분(지난해 기준 62%)이 석유에서 나오니 말이죠. 실제 2014~2016년의 3차 유가전쟁 당시, 사우디는 3년 연속 재정적자를 기록하며 어려움을 겪었죠.
그런데도 사우디가 이런 도박을 피하지 않는 건 유가가 극단적으로 하락해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단 자신감 때문입니다.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가 밝힌 원유 생산(탐사·시추) 비용은 2024년 기준 배럴당 평균 3.53달러. 여기에 각종 비용(운반비·투자비·세금 등)을 다 포함해도 총 생산 단가는 배럴당 10달러 정도로 추정됩니다. 주요 산유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인데요. 사우디는 유정 대부분이 추출하기 쉬운 육상에 있고요. 이미 발견된 매장량이 충분해서 새로운 탐사도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렴한 인건비, 풍부한 인프라, 규모의 경제도 이미 갖췄고요.
물론 유가 전망은 잘 들어맞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스라엘 사태로 국제 유가가 100달러까지 갈 수 있다’(JP모건)고 호들갑 떨었던 걸 생각하면 좀 머쓱하긴 한데요. 그래도 지금 나오는 전망(국제유가 배럴당 60달러 안팎)을 기준으로 주요 산유국에 미칠 영향을 좀 따져볼까요.
①사우디아라비아, 재정적자 심화
배럴당 90달러. 사우디가 재정수지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유가 수준이죠. 이미 유가 하락 영향으로 올해 1분기에 사우디는 약 22조원(587억 리얄)의 재정적자를 기록했고요. 이렇게 유가가 60달러까지 떨어지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텐데요. 이미 골드만삭스는 유가 62달러 시나리오에서 올해 사우디 재정적자가 최대 750억 달러(104조원)가 될 수 있단 전망을 내놨죠.
물론 적자가 난다고 해서 사우디 경제에 당장 큰일이 나는 건 아닙니다. 외환보유고(4300억 달러)가 탄탄한 데다, 국가 부채비율(GDP 대비 30%)도 매우 낮고, 신용등급(S&P 기준 A+)도 짱짱하니까요. 빚으로 적자를 메울 여력이 충분하죠.
하지만 예전처럼 흥청망청하긴 어려울 겁니다. 사우디는 동계 아시안게임(2029년)과 엑스포(2030년), 월드컵 개최(2034년)까지. 이미 벌여놓은 프로젝트가 너무 많죠.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1조 달러를 투자하라”고 압박하고 있고요. 빚내서 메운다고 해도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②미국 셰일 업계, 올스톱
“미국 내륙의 석유생산량은 정점을 찍었고 이번 분기부터 감소할 겁니다. 운전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빨간 신호등에 접근하며 가속 페달을 떼는 중입니다. ”
최근 미국 원유 생산업체 다이아몬드백 에너지의 트래비스 스타이스 CEO가 공개한 주주 서한이 화제가 됐습니다. 유가하락으로 미국 석유업계가 처한 어려움을 드러내 줬는데요.
그 피바다, 과거 사우디가 2014년 말 촉발했던 3차 유가전쟁에서 이미 겪은 적 있습니다. 당시 2년 동안 파산 신청한 북미 석유·가스 생산업체만 무려 100여곳. 10년 전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유가 급락에 업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③러시아, 전쟁자금 압박
석유 팔아 전쟁 비용을 마련해 오던 러시아. 유가 급락으로 러시아산 우랄 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 아래까지 떨어지면서 초조합니다. 러시아 정부가 올해 예산에서 예상한 가격(69달러)에 한참 못 미치니까요.
그렇다고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당장 전쟁을 멈추거나 국방비 지출을 줄일 걸로 전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 그동안 석유 팔아서 모아둔 복지기금을 털어서라도 버티려고 하겠죠. 그래도 안 되면 세금을 더 걷거나, 아예 중앙은행이 돈을 더 찍어내는 방법도 있고요. 물론, 이미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러시아 경제엔 치명적일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상황이 트럼프 대통령 바람대로 러시아를 휴전협상장으로 끌어낼지도?
사실 고유가와 저유가의 반복은 원유 시장에선 일상입니다. 유가가 급락한 뒤엔 석유 수요가 급증하고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시 고유가가 찾아오기를 지난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왔죠. 지금 유가가 얼마나 더 떨어질진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그 결말은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도 석유 수입국으로서 당분간은 조금 여유 있게 원유시장을 지켜볼 수 있겠습니다. By.딥다이브
2000년대 이후에도 국제유가는 배럴당 140달러부터 20달러까지 오르락내리락 해왔습니다. 지금의 유가하락세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안전벨트를 매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이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산유국의 협의체인 OPEC+가 3개월 연속 증산을 결정했습니다. 증산으로 유가를 떨어뜨리려는 사우디 의도가 담겨있죠. 할당량을 지키지 않는 회원국을 응징하고, 유가에 관심 많은 트럼프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건 혹시 새로운 유가 전쟁의 시작일까요. 그동안 사우디는 총 4차례 유가전쟁을 벌였고, 그때마다 유가는 무섭게 떨어지곤 했습니다. 유독 원유 생산단가가 저렴한 사우디는 출혈을 감수하고 유가전쟁을 벌일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배럴당 60달러의 유가만으로도 주요 산유국엔 큰 압박이 됩니다. 사우디는 네옴 프로젝트를 재검토하고, 미국 셰일업계는 신규 시추를 중단하고, 러시아는 전쟁자금 마련이 빠듯해졌죠. 과연 승자는 누가 될까요.
*이 기사는 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https://www.donga.com/news/Newsletter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