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기어이 한국 반도체 기업에 주는 보조금을 기존에 약속한 금액의 절반 이하로 깎을 조짐이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과 체결한 보조금과 관련해 “투자액의 4% 이하가 적절하다. 10%는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언급했다. 지난 4일 청문회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 대미 투자액 중 10% 이상을 보조금으로 되돌려받기로 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조단위 손실이 유력해졌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전 정부가 맺은 국가 간 약속을 파기하고 일방적으로 재통보하는 방식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보기 어렵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비상식적 행보는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주말 한국을 포함한 9개국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하면서 하반기부터 연기금 등 정부 투자기관을 활용한 환율 조정 여부를 심층 분석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환율 개입 등의 문제가 발견되면 관세 등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국민연금이 미국 주식이나 부동산 등을 취득하기 위해 달러를 대거 사들이는 자연스러운 투자활동에 제동을 건 셈이다. 환율 관찰대상국까지는 별다른 불이익이 없지만 ‘조작대상국’으로 지목되면 직접 경제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으로서는 큰 부담이자 악재다. ‘달러 약세’라는 정책 목표 달성이 시급하다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타국의 연기금 운용에까지 개입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국익이 최우선인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가 동반돼야 한다. 외교와 통상의 기본 원칙은 상호주의다. 한 번 체결한 계약은 그대로 이행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MAGA’(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는 세계의 리더답지 못하다. 협박과 말 바꾸기를 ‘협상’이란 말로 미화하고 오랜 동맹을 적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거친 매너에도 미국은 경제와 안보 등 여러 면에서 한국에 가장 중요한 파트너다. 새 정부 출범으로 본격화한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판을 깨지 않으면서 국익을 지켜내는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하다. 어디로 튈지 예상이 안 되는 상대라는 점까지 감안한 만반의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