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덩이서 다시 일어서도록 이재민들 손 잡아줄 때
피해 지역 주민들은 대개 재난 문자 확인에 서툴고 몸놀림이 둔한 고령자들이다. 사람 뛰는 속도보다 빨랐다는 괴물 산불에서 구사일생한 이들은 “이웃 덕분에”라고 입을 모았다. 경북 안동의 임순희 씨(75)는 불길이 번진 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젊은이가 차를 끌고 나타나 “어르신 얼른 타세요” 해서 살았단다. 영덕 주민 오순자 씨(83) 등 5명도 차로 집집을 돌던 권오삼 씨(70) 부자 덕에 불길을 피했다. 영양군의 한 주민은 구순 넘은 노모의 대피를 이웃집에 부탁한 후 다른 주민들 대피를 돕다 그만 노모를 잃었다. 그는 “엄마를 못 지킨 아들”이라 자책하면서도 남 탓은 하지 않았다. “평생 상상도 못 했던 산불이었다. 다들 경황이 없었을 텐데 누굴 원망하겠나.”
찔끔 내리다 만 비가 사나운 불길은 못 잡아도 바싹 마른 대기를 적셔 도깨비처럼 날아다니던 불똥의 힘은 빼놓았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어제도 진화요원 5500여 명이 일주일 넘게 쪽잠을 자가며 벌인 사투에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하늘과 땅에서 총력전을 펼쳤다. 동아일보 취재진이 산불 현장에서 만난 진화요원들 중엔 이번 산불로 집을 잃고 신발만 챙겨 나온 이도 있었고, 형님처럼 따르던 동료를 진화 작업 도중 잃은 56세 대원도 있었다. 그래도 “슬퍼할 겨를이 없다. 내 자식 내 후손들도 쓸 산림인데 나무 한 그루라도 지켜내야지, 이 마음 하나로 버틴다”고 했다.
집도, 가재도구도 다 타버리고 더 잃을 것도 없는 이재민들을 자원봉사자들이 돕고 있다. “남 일 같지 않아서” “내 부모님 같아서” 달려온 이웃들이 독한 산불 연기를 뒤집어쓴 채 식사를 챙기고 잠자리를 돌본다. 뒷산 잔불이라도 끄겠다며 달려온 고령의 의용소방대원들도 있다. 그 덕분에 기운을 차린 이재민들이 검게 타버린 밭으로 나가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가꿔온 것들을 한순간에 잃고도 서로 손 잡아주며 다시 일어설 채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절감한다. 여야가 벌이는 ‘재난 예비비’ 공방이 얼마나 공허한가를. 남을 돕다 노모 잃고도 누굴 원망 않고 자책하는 아들의 눈물은 우리 모두가 닦아줘야 한다.- 좋아요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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