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금융·통신사에 보이스피싱 배상책임, 기준·범위 정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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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8.29 17:22 수정2025.08.29 17:22 지면A23

정부가 보이스피싱 피해액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은행 등 금융회사가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내 법제화하겠다고 한다. 이른바 ‘무과실 배상책임’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제 이 같은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보이스피싱이 인공지능(AI)과 정교한 시나리오를 활용해 진화하면서, 개인의 주의·노력만으로는 피해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고도의 전문성과 인프라를 갖춘 금융사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현재 금융권은 비밀번호 위·변조에 따른 제3자 이체 사고에 한해서만 자율 배상을 하고 있다.

정부가 ‘보이스피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책을 강화하는 것은 당연히 시급하고 필요한 일이다.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올 들어 7월까지 776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급증해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러나 과실 없는 금융사에까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 정부가 참고했다는 영국과 싱가포르도 무조건 배상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영국은 송금 은행과 수취 은행이 절반씩 책임을 지되, 고객이 공모했거나 합리적인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는 환급을 거부할 수 있다. 싱가포르도 은행과 이동통신사의 의무 이행 여부를 먼저 따져 문제가 없으면 고객이 손실을 부담하도록 한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에서는 무과실 책임제를 찾아보기 힘들다. 통신사에 대한 책임 강화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대리점·판매점의 휴대폰 불법 개통을 이유로 등록 취소나 영업정지까지 거론하는 것은 현실적인 관리 한계를 고려할 때 과도하다.

아무런 주의 없이 송금해도 모두 배상받을 수 있다면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이 떨어질 수도 있다. 나아가 환불금을 노린 새로운 범죄와 모럴 해저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범죄자는 처벌받지 않고 금융사와 통신사만 비용을 떠안는다는 불만도 제기될 것이다. 금융사의 비용 부담이 고객 수수료나 대출 금리에 전가되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정부는 법제화 과정에서 금융권과 충분히 협의해 책임 기준과 범위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을 민간에 떠넘긴다는 비판이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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