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영토 확장에 나선 국내 은행이 현지 금융당국의 규제장벽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한 해 수십 건이 넘는 과징금 폭탄에다 난데없는 현지 지주사 설립까지 강요받으면서다. 금융권에서는 세지는 각국 규제 수위에 맞춰 민관 합동 금융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금융감독국(OJK)은 현지에 진출한 국내 은행에 오는 6월까지 금융지주사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일정 규모 이상 금융회사는 의무적으로 지주사를 설립하도록 작년 말 현지 규정을 손질한 데 따른 것이다. 자본금이 100조루피아(약 8조5000억원) 이상이면서 현지에 2개 이상의 금융 계열사를 뒀거나, 20조~100조루피아 사이 자본금을 보유하고 금융 계열사가 3곳 이상인 은행이 대상이다. 해당 금융사는 계획서를 제출한 뒤 1년 안에 지주사를 설립해야 한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는 국민 신한 하나 우리 기업 등 5개 은행과 OK저축은행을 합쳐 총 6곳이다. 이 가운데 지주사 설립 요구를 받은 곳은 국민과 신한은행이다. 두 곳은 갑자기 지주사 설립을 위한 법률 검토부터 추가 인력과 자금 투자까지 준비해야할 처지에 내몰렸다.
해외 금융당국 제재…2년 만에 72% 폭증
우물 밖으로 나간 국내 은행들이 해외 금융당국의 텃세에 시달리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소액 과징금 처분을 쏟아내는 현지 금융당국의 ‘폭탄 제재’에 업무 차질이 빚어질 정도다. 은행들은 현지 지분 투자로 우회로를 찾아 나서고 있다. 국내 은행이 ‘내수용’ ‘이자 장사’ 오명에서 벗어나 글로벌 금융사로 도약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해외 당국발 ‘폭탄 제재’
1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국내 4대 은행은 지난해 해외 금융당국에서 31건의 제재 처분을 받았다. 2년 전 18건과 비교해 72% 폭증했다. 국민은행 인도네시아법인인 KB뱅크(옛 부코핀은행)는 지난해 18건의 현지 금융당국(OJK) 제재를 받았다. 2018년 부코핀은행을 인수한 후 한 해 1~2건에 불과하던 제재가 최근 들어 급증했다. 작년 말에는 사업보고서 제출 지연을 이유로 740만루피아(약 63만원), 금융정보서비스시스템(SLIK) 보고서 기한 초과로 940만루피아(약 80만원)를 처분받기도 했다.
다른 은행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우리은행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지점 고객의 거래 내역 정보를 누락해 5000루블(약 8만원)의 벌금을 냈다. 신한은행은 멕시코에서 달러 이체 데이터 관리 미흡을 이유로 과징금 9만5140페소(약 667만원)의 제재를 받았다. 한 시중은행 글로벌담당 부행장은 “해외 진출 초기엔 황무지 같은 금융 후진국에 기반을 닦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면 현재는 현지 금융당국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게 급선무”라며 “그만큼 사업 난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 높아지는 규제·제재 수위
문제는 규제와 제재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 지주사 설립 요구가 대표적이다. 국내에 이미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4대 금융은 인도네시아의 달라진 규정에 따라 중간지주사를 세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장 적용 대상이 된 국민 신한은 지주사 설립 방안 수립에 들어갔다. 은행권 관계자는 “인도네시아 당국이 오는 6월까지 계획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어 지주사 설립 형태와 투자 규모 등을 정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도 상황 파악에 분주하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인도네시아 당국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무분별한 제재가 반복되자 현지 정부와 국내 금융사 간 소송전도 불거지고 있다. 인도 당국은 하나은행 첸나이지점이 주재원 급여 관련 재화용역세(GST)를 미납했다는 이유로 과태료(6793만7196루피·약 11억2000만원) 철퇴를 내렸다. 하나은행은 부당한 과세에 맞서 불복 소송에 나섰다.
◇ ‘우회로’ 찾는 은행들
국내 은행들은 불확실성에 맞서 직접 진출 대신 지분 투자를 통해 우회로를 찾고 있다. 감독당국의 규제가 덜한 현지 금융사에 투자하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서다. 카카오뱅크는 2023년 9월 동남아 최대 플랫폼기업인 그랩과 손잡고 인도네시아 신생 은행인 슈퍼뱅크 지분 10%를 인수했다. 지난해 6월 공식 출범한 슈퍼뱅크는 8개월 만인 올 2월 가입자 300만 명을 확보하며 빠르게 성장 중이다. 지분 투자를 계기로 윤호영 카카오뱅크 대표는 작년 4월 그랩 사외이사에 선임되기도 했다.
신한은행도 작년 4월 인도 학자금 대출 1위 기업인 크레딜라의 지분 10%를 취득했다. 신한은행은 인도에 6개 지점을 운영 중이었지만 현지 기업 노하우를 배워 인도 영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분 투자를 결정했다. 박해식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분 인수를 통한 해외 진출은 현지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비이자이익을 창출하는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박재원/서형교/장현주/정의진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