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휩쓰는 ‘토큰화’ 물결…韓 금융사 생존 게임
T+0 정산 시대 개막, 백엔드 효율화가 핵심
韓 STO 법제화 첫발…갈라파고스 규제 넘어야
디지털자산기본법 표류…글로벌 격차 벌어져
전통 금융과 디지털자산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단순 투자 대상이었던 가상자산이 이제는 결제·정산 인프라로 진입하면서 금융사들의 전략 변화가 불가피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KB증권은 7일 보고서를 통해 “블록체인 기술의 금융 인프라 편입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금융 시스템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 실물자산 토큰화 시장 13배 폭증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을 제외한 글로벌 실물자산 토큰화(RWA) 시장은 2026년 3월 기준 약 265억달러(약 36조원) 규모로 2023년 말 19억달러 대비 13배 이상 성장했다.
자산 유형별로는 토큰화 신용(사모 신용) 시장이 약 240억달러로 최대 자산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미국 국채 토큰화가 약 111억달러로 뒤를 잇고 있다.
블랙록의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MF) ‘BUIDL’은 이 시장의 상징적 존재다. 2024년 3월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서 출시된 BUIDL은 운용자산 규모 29억달러를 돌파했고, 누적 배당금 1억달러 이상을 온체인으로 지급했다. 탈중앙화거래소 유니스왑엑스에서도 거래가 가능해지면서 전통금융과 디파이(DeFi)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JP모건은 자체 프라이빗 블록체인 ‘키넥시스(Kinexys)’를 운영하며 이더리움 기반 MMF 토큰화 상품 ‘MONY’를 출시했다. 보고서는 “주요 금융사들이 단순 기술 투자를 넘어 금융 인프라에 블록체인 기술을 편입하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 스테이블코인 3130억달러…비자 거래량 추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성장세는 더욱 가파르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3,130억달러에 달하며 2025년 한 해에만 49% 성장했다. 2024년에는 스테이블코인 거래액이 비자를 넘어서면서 금융 인프라로서의 위상이 부각됐다.
시장은 USDT(테더)와 USDC(서클)가 각각 60.0%, 25.3%의 점유율로 양분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2025년 7월 미국 지니어스 법(GENIUS Act) 통과 이후 준비금 규제에 가장 적합한 USDC의 성장률이 USDT를 2년 연속 추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크립토 네이티브 진영에서는 에테나(Ethena)의 USDe가 140억달러 이상으로 급성장해 시장 점유율 5%대를 확보했고 전통금융 진영에서는 페이팔의 PYUSD가 25억달러 이상으로 본격 성장하며 대형 결제 플랫폼의 시장 진입을 알렸다.
씨티그룹은 2030년 스테이블코인 발행 규모를 기본 시나리오 1.9조달러, 강세 시나리오 4.0조달러로 전망했으며 미국 재무부는 2028년까지 약 3조달러 규모 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 비자 vs 마스터카드, ‘온체인 결제’ 선점 경쟁
보고서가 가장 주목한 글로벌 사례는 비자와 마스터카드의 스테이블코인 전략이다. 두 카드 네트워크 거인의 접근법은 확연히 다르다.
비자는 ‘소비자 경험은 바꾸지 않으면서 백엔드 정산 인프라를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025년 12월 미국 내 USDC 정산 서비스를 공식 출시했으며 스테이블코인 정산 규모는 2026년 1분기 기준 연환산 46억달러를 돌파했다. 50개국 이상에서 130개 넘는 스테이블코인 연동 카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마스터카드는 소비자 결제에서 B2B 정산, 디지털자산 연결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향이다. 2023년 출범한 MTN(Multi-Token Network)을 통해 JP모건 키넥시스, 온도 파이낸스의 토큰화 국채 등과 연결하며 생태계를 넓히고 있다.
보고서는 “글로벌 카드 네트워크 2개사가 동시에 스테이블코인 정산 인프라를 가동한 이상 은행과 핀테크도 기존 결제 시스템의 변화를 무시할 수 없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 “백엔드 효율화가 핵심, UI 변화는 나중”
보고서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메시지는 ‘블록체인 기반 금융의 효율성은 UI가 아닌 금융 인프라에서 창출된다’는 것이다. 프론트 엔드보다 백엔드 중심의 효율성 제고가 핵심이라는 판단이다.
그 근거로 보고서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먼저 기존 금융인프라가 충분히 작동하는 국가의 소비자는 앱·카드·계좌 등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변경할 수요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블록체인의 경제적 효용은 운영 프로세스 단순화와 통합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끝으로 기존 금융 시스템을 한 번에 블록체인 기반으로 전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다만 보고서는 블록체인 기술의 한계도 분명히 지적한다. 결제 완결성 문제, 데이터 프라이버시, 확장성, 스마트컨트랙트의 법률적 책임, 네이티브 코인의 가격 변동성 등 금융 인프라로서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이로 인해 금융사들은 퍼블릭 블록체인을 핵심 인프라로 전면 채택하기보다는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 예금토큰, 허가형 DLT, 상호운용성 레이어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단계적 접근을 하고 있다.
◆ 주식 토큰화 ‘대전’…NYSE·나스닥·DTCC 동시 진출
보고서는 최근 빠르게 확장되는 주식 토큰화 시장에도 주목했다. NYSE, 나스닥, DTCC가 이미 주식 토큰화 인프라 구축 및 서비스 도입을 발표했다.
올해 1월 SEC는 토큰화 증권의 정의와 규제 분류 체계를 정리했다. 발행자 주도형(발행자가 직접 토큰 형태로 발행)과 제3자 주도형(제3자가 기존 증권 기반으로 토큰 발행)으로 구분했고 제3자 주도형은 보관형(Custodial)과 합성형(Synthetic)으로 다시 나뉜다.
나스닥·DTCC·NYSE 등의 토큰화 움직임은 대부분 보관형에 해당하며, 로빈후드·크라켄 등이 제공하는 토큰화 주식은 합성형이다.
특히 보고서는 유통 채널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에 주목했다. 온도 파이낸스가 메타마스크 등과 파트너십을 통해 셀프 커스터디 월렛에서 토큰화된 미국 주식 및 ETF를 직접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증권 유통이 기존 거래소·ATS 중심에서 월렛 기반 모델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보고서의 또 하나의 핵심 메시지는 2021년 핀테크의 급부상이 전통 금융권에 남긴 교훈이다. 2021년 카카오뱅크 상장 당시 월평균 시가총액 38.8조원은 KB금융(21.9조원)의 1.8배에 달했다. 총자산과 이익이 KB금융의 5% 수준에 불과했음에도 투자자들은 핀테크에 파격적 밸류에이션을 부여했다.
보고서는 “더 저렴하고, 더 빠르고, 더 편리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면 고객은 해당 플랫폼으로 이동했고, 그것이 핀테크의 성장 원동력이었다”며 “블록체인 기반 금융 인프라 경쟁은 한국 시장 내부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과의 경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경 간 결제, 크로스보더 정산 등에서 블록체인 효율성이 발휘되면, 한국 금융사의 인프라가 글로벌 경쟁에 직접 노출될 수 있다는 의미다.
◆ 디지털자산기본법 ‘법제화 표류’…규제 공백이 가장 큰 리스크
시장 환경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는 규제다. 보고서는 한국의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논의가 EU의 미카(MiCA), 미국의 지니어스 법·클래리티 법(CLARITY Act)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속도 면에서 뒤처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은 현재 국회에서 사실상 멈춰 있다.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 스테이블코인 감독권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 여야 간 규제 강도를 둘러싼 이견 등으로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상정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보고서는 현행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거래소 중심 사후 보호 규제에 머물러 있어 발행·유통·결제 기능을 포괄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 발행 요건·준비금·상환 절차에 대한 법적 기준이 부재하고, 금융기관의 디지털자산 직접 참여 경로가 막혀 있어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재 국회에 총 8개 법안(디지털자산 기본법 5건, 스테이블코인 법안 3건)이 계류 중이며 정부안과 금융위 검토안이 절충된 최종안으로 제정될 예정이다.
핵심 쟁점은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은행 중심(50%+1주) 컨소시엄으로 한정할지 핀테크·블록체인 기업에도 개방할지 여부다.
◆ “단계적 전환은 불가피, 장기적 온체인 대비 필수”
투자상품 측면에서 금융기관이 주목해야 할 전략적 과제도 제시됐다.
초기 시장 진입 여부가 향후 점유율 구조를 결정하므로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또한 초기에는 토큰화 자체가 차별화 요소이나 시장 성장 이후에는 새로운 투자 경험을 제공하는 자산 선택과 상품 설계 능력이 중장기 경쟁력을 결정한다. 완전한 온체인 금융 전환에 대비한 중장기 전략도 필요하다.
토큰화가 제공하는 이점으로는 접근성, 유동성, 운영 효율, 투명성, 스마트컨트랙트 자동화, 결합가능성, 글로벌 연결성 등 7가지가 제시됐다.
결국 블록체인이 갖는 기술적 한계와 제도 환경의 미비로 단기적 전면 대체는 어렵지만 전통금융사와 핀테크의 블록체인 기술 내재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지원 KB증권 디지털자산팀장은 “블록체인 기술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금융 인프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프라 및 규제 기반 위에서 거래를 처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운영체계 구축이 필수”라며 “장기적으로는 완전한 온체인 금융 전환에 대비한 인프라 설계와 내부 역량 축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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