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핵보유국)’라고 또다시 지칭하며 인도·파키스탄 등 ‘사실상 핵보유국’과 동일선상에 놓는 듯한 언급을 이어간 것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서 인정하는 핵보유국은 아니지만,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식되는 나라들과 북한을 나란히 거론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기존의 외교적 문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나 이해관계에만 집중하는 특유의 화법에 따른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를 지칭하는 외교적 용어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가 있다.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등 5개국은 1968년 체결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국제법상으로 핵무기 보유국의 지위를 지닌다.
국제법상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핵무기 기술을 보유하거나 활용하는 국가를 지칭할 때 ‘뉴클리어 스테이트(Nuclear State)’,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 등의 용어가 사용하곤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인도·파키스탄과 함께 이스라엘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대 미국 정부는 북한에 대해 이같은 용어 사용을 자제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듯한 뉘앙스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뉴클리어 파워’라는 용어의 외교적 함의를 인지하고 발언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물론 단순히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언급했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취지의 발언이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 목표에서 후퇴해 북한과 군축(핵무기 감축) 협상에 나서거나,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국에 직접 위협이 되는 사안만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대북 관여를 추진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탄핵사태와 같은 정치적 변수 속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국을 ‘패싱’할 수 있는 우려가 또다시 제기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서는 그간 인도, 파키스탄 같은 ‘뉴클리어 파워’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것에 구애받을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보다는 김 위원장과의 개인적 우호관계 회복 등을 위해 기존 북핵 외교·협상 프레임을 깨고 나올 가능성을 제기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복잡한 협상에 매달리기 보다는 미북 정상회담 등 가시적인 이벤트를 우선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예측하기 힘든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순간에 그간 북핵문제를 다룰때 사용됐던 게임의 법칙을 깨고 김 위원장과 좌충우돌식 ‘원맨쇼’를 펼칠 개연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현재 미 행정부 외교안보팀 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불가능한 과속을 제어할 만한 인사가 없다는 점도 불안요소로 지목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잇따른 ‘북한 핵보유국’ 발언을 미국의 대북 입장의 근본적 전환으로 보기는 이르다는 반론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대화 재개를 위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다소 비외교적인 표현을 썼지만, 실제 대화판이 다시 열리면 북한을 인도·파키스탄과 같은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다.
익명을 원한 전직 외교안보부처 고위 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전후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라고 칭한 것은, 북한이 가진 핵무기의 실체를 부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향후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국과 긴밀히 조율하겠다고 공식 확인했고, 막상 미북대화가 재개되더라도 여러 측면에서 한국과의 협업과 지원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코리아 패싱’을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뉴클리어 파워’ 논란의 시작점은 지난 1월 14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인사청문회였다. 헤그세스 장관은 당시 사전 제출한 답변서에서 “‘뉴클리어 파워’로서 북한의 지위”를 언급했다.
며칠 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지난 1월 20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에 “나는 김정은과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는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매우 잘 지냈다”면서 “이제 그는 ‘뉴클리어 파워’다. 우리는 잘 지냈다. 내가 돌아온 것을 그가 반기리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던 바 있다.
논란이 사그라든 시점은 지난달 7일 있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미일 정상회담이었다. 이날 회담 결과로 나온 공동성명에는 “두 정상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해결의 필요성을 표명하고,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단호한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지난달 15일 독일 뮌헨에서 있었던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첫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에서도 세 나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에 따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공동성명에서 밝히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재확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