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한 명은 김명식 해군사령관이고, 다른 한 명은 홍길호 청진조선소 지배인입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숙청된 인물들이 훨씬 많겠지만, 외부 세계에서 숙청 사실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정도입니다. 두 사람은 북한 조선중앙TV에 등장할 정도의 지위에 있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홍길호는 6월 14일 방영된 강건호 진수 기념식 영상에서 김정은의 현지시찰에 동행한 과거 사진이 편집됐습니다. 김명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김명식의 얼굴은 15일 뒤 부활했습니다. 물론 몸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으나, 화면에선 다시 나타났습니다. 조선중앙TV가 지난달 29일 방영한 기록영화 ‘위민헌신의 여정, 새로운 변혁의 2024년’에 김정은을 따라다니는 김명식의 얼굴이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 기록말살형의 역사
기록을 말살하는 ‘형벌’은 21세기에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온 가족을 숙청하는 연좌제와 더불어 지구상에 유물처럼 존재하는 악명 높은 처벌입니다.기록말살형은 역사가 참 오래된 형벌입니다. 기록말살형을 받은 최초의 기록된 인물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라고 합니다. 약 3500년 전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는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인도해 가나안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오가 그의 모든 이름을 삭제하는 형을 내렸다고 합니다. 파라오가 누군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람세스 3세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없어지면 존재도 사라진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영화 ‘300’에선 기원전 480년경 스파르타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나 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물론 작가가 만든 대사겠지만, 시대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천 년의 로마제국(기원전 753년~기원후 476년) 시대에도 최고의 형벌은 기록말살형이었다고 합니다. 이 형벌에 처하면 로마인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이 모두 강제 회수돼 파괴됩니다.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이름은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초상이나 기록은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립니다.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이 밟고 다니는 도로에 깔아 모욕당하게 만들고 살던 집도 철거합니다. 사라진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로마에서도 대역죄가 아닌 이상,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는 없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한 형벌이 존재합니다. 조선시대에 ‘삭명(削名)’이란 형벌이 있었습니다.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유적에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의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이 형벌은 영조 시대 편찬된 통일 법전인 속대전(1746년)을 통해 금지됐습니다.
점차 사라져가던 기록말살형을 현대 사회에서 부활시킨 이는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말살을 당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축구협회는 러시아 축구클럽에서 뛰는 아나톨리 티모슈크를 반역자로 간주해 우크라이나인으로 달성한 그의 기록을 말소했습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최다 출전자가 티모슈크에서 안드리 셰우첸코(셰브첸코)로 교체됐습니다.
● 모든 형벌의 부활
최근엔 기록말살형을 이야기할 때, 북한을 제외하면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회를 만든다고 사기를 치고 3대 세습 왕조를 부활시킨 북한은, 과거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형태의 기록말살형도 그대로 부활시켰습니다. 영상에서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아주 일부의 사실에 불과합니다.북한은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록을 지우고 철거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 방식은 물론, 조선시대의 부관참시, 묵삭, 부황영삭까지 다 되살려냈습니다. 부관참시를 당한 대표적 인물로는 1984년에 사망한 김만금 전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 굶어 죽는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해지자 김정일은 김만금을 간첩으로 몰아 유해를 꺼내 부셨습니다.
2013년 12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은 모든 종류의 기록말살형에 다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모든 기록이 삭제됐을 뿐만 아니라 그가 책임지고 건설했던 멀쩡한 건축물까지 허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수억 달러를 들여 2012년 완공했던 평양민속공원인데, 장성택 숙청 3년 뒤 몽땅 허물어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장군님의 은덕으로 인민을 위한 공원이 만들어졌다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하다가 불과 몇 년 뒤 새로 만든 공원을 흔적도 없이 부순 것입니다.
특정인에 대해 기록 말살이 결정되면 이는 각 지역의 노동당 조직에 통보가 됩니다. “그 인물의 이름이나 사진이 어느 저서에 실렸으니 지우라”는 지시가 하달됩니다. 그러면 당 간부들이 모든 집을 방문해 해당 저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지시를 수행합니다.
북한 가정집들에 있는 책 대다수는 구매한 것이 아니라 당국이 주민을 세뇌하기 위해 나눠준 것들입니다. 이런 책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입니다.
첫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의 사상이나 노작(勞作)이 담긴 수백 권이 훌쩍 넘는 책들입니다. 34권짜리 ‘김일성전집’, 65권짜리 ‘김정일전집’이 대표적입니다.
두 번째 종류는 김씨 일가를 찬양하는 저서입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김씨 일가와 함께 일을 했다는 사람들이 쓴 회고담을 책으로 묶어낸 것입니다. 김일성 회상실기집 ‘인민들속에서’는 무려 112권이나 발간됐습니다. 각각의 책엔 김일성을 찬양하는 수십 명의 회고록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할 때 우리가 이렇게 하려 했는데, 영명하신 수령님이 그건 아니라며 우리의 잘못된 눈을 띄워주었다”는 내용들이 꽉 차 있습니다. 김정일 회상실기집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는 82권이 출판됐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김씨 일가 찬양 회고담을 쓴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중 누가 숙청될 때마다 당 간부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전국의 가정집을 뒤져야 합니다. 흔적을 없애는 대상도 책이나 화보, 신문 등 모든 것에 해당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북한의 오래된 책은 성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누더기가 된 대표적인 책은 1959년부터 1970년까지 총 12권이 출판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입니다. 이름 그대로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을 회상한 동료들의 구술을 정리한 것인데, 3대 세습까지 내려오며 반세기 동안 가장 많이 숙청된 사람들이 빨치산 출신이기도 합니다.
숙청 대상이 나오면 그가 쓴 내용 수십 페이지를 통째로 잘라갑니다. 아무리 김일성을 칭찬한 내용이라도 그의 이름과 기억을 매체에 남겨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회상자의 글에 숙청자의 이름이나 행적이 언급되면, 이건 자를 수 없으니 꺼먼 먹으로 그 대목을 쭉 지워버립니다. 또는 부황영삭처럼 종이띠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책은 3분에 1도 남아있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도 먹칠 부분이 가득 차 읽을 수조차 없게 됩니다.
물론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처럼 오래된 책들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휴지로 애용돼 가정마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있을까 싶긴 합니다. 하도 참기 어려웠는지 북한은 2003년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회상기만 묶어 다시 똑같은 제목의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 누가 기록말살에 처해질까
이런 소동이 벌어지니 북한 사람들은 고위급이 숙청되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특히 김명식 해군사령관 같은 경우는 김정은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듯한 모습을 여러 번 연출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기억할 겁니다. 그는 김정은과 모자를 바꾸어 쓴 사진이 두 번이나 북한 매체에 실렸습니다. 김정은이 모자를 바꿔 쓴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런 사진은 꽤 인상적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좋아하던 인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구나”는 확실히 각인시켜 줄 순 있겠죠.
김정은이 누굴 숙청할 때마다 “이 자는 처형만 하고, 이 자는 가족까지 죽이고, 이 자는 기록말살까지 하라”고 지시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아래 간부들이 눈치껏 기록말살까지 했다가 김정은이 “내가 거기까지 하라고 했냐”며 화를 내면 처벌을 피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결정할 순 없을 겁니다.
분명 내부에 어떤 기준은 있을 것이지만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김정은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라고 할 때 암시를 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숨 쉴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하면 처형을 하고, “묻힐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욕하면 차마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게 처형한 뒤 시신을 화염방사기로 태워 흔적도 없앤다고 합니다. 4신 고사총 처형도 여기에 해당하죠. 수천 명을 모아놓고 처형할 땐 아마 “지시를 거역한 것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라”고 하지 않을까요.
물론 김정은의 지시로 처형되면 가족까지 연좌제로 모두 처벌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기록말살형은 어떤 인물들에 해당하는지, 이를 최종 비준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우리가 알 순 없지만 통일이 되면 많은 것들이 밝혀질 겁니다.
그리고 북한이 지우려고 해도 다 지울 순 없는 것들도 꽤 많습니다. 한국에도 북한이 출판한 저서들이 꽤 들어와 있는데, 당 간부들이 한국까지 찾아와 지워버릴 순 없는 일이죠.
통일이 되면 숙청의 기록만 정리해도 수십 년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북한 같은 참혹한 인권 유린의 시대를 후손들이 다시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 방대한 작업은 반드시 해야 할 것입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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