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식사는 엘불리(El Bulli)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카탈루냐 해안의 외진 어촌에서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가 이끌었던 이 레스토랑은 수백 년간 군림해온 프렌치 중심의 파인다이닝 체계를 해체했다. 주방은 연구소가 됐고, 디쉬 하나하나를 실험의 무대로 바꾸어 놓았다.
이곳에서 분자요리라는 장르가 탄생했고, 테이스팅 코스라는 개념이 다시 쓰였으며, 전 세계 셰프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2011년 정점에서 스스로 문을 닫기까지, 엘불리는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 1위에 다섯 번 올랐다. 문을 닫은 레스토랑이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미식계의 하나의 척도로 존재하고 있다.
엘 불리의 유산은 어디로 갔을까. 2024년 월드 50 베스트 1위를 거머쥔 레스토랑 디스프루타(Disfrutar)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화려한 답이다. 지난해 가을, 다이닝홀이 아닌 지하의 비밀 공간, 오직 하루 1팀, 4인 이상만 예약할 수 있는 '더 리빙 테이블(The Living Table)'을 경험해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곳의 코스는 미식의 영역을 넘어 종합예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엘볼리의 심장이 옮겨간 자리
디스프루타를 이끄는 세 명의 셰프는 모두 엘불리의 크리에이티브 팀 출신이다. 오리올 카스트로(Oriol Castro)는 파티시에로 입사해 전체 메뉴 구조와 연구개발 방향을 설계하는 두뇌로 성장했고, 마테우 카사냐스(Mateu Casañas)는 가족이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자라 주방의 전 포지션을 경험한 '균형의 셰프'다. 에두아르드 샤트루흐(Eduard Xatruch)는 팻덕, 르 칼랑드레 등 유럽의 최전선을 두루 거친 창의성 전문가다. 대부분의 파인다이닝이 단일 셰프의 천재성에 기대는 반면, 이들은 서로를 검증하는 '밴드' 체제로 10년간 움직여왔다.
엘불리 폐업 이후에도 세 사람은 '불리피디아' 프로젝트를 통해 과거의 실험을 다시 한 번 구현하려 했다. 2014년 바르셀로나 메르카트 델 니노트 맞은편에 문을 연 디스프루타는 이름 그대로 '즐기다, 만끽하다'라는 뜻이다. 연구실에서 태어난 결과물을 가장 즐거운 방식으로 손님에게 전달하겠다는 선언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페란 아드리아의 제자들'이라는 꼬리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셀러의 벽이 문으로 열리는 순간
더 리빙 테이블로 가는 길은 한 편의 영화 도입부 같다. 여느 다른 바르셀로나의 레스토랑 같은 내부와 로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디스프루타의 와인 셀러가 나타난다. 수천 병의 프랑스·스페인 올드 빈티지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도열한 공간. 목적지가 가까이 왔다는 감각은 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 스태프가 셀러 한쪽의 어두운 곳으로 안내를 하더니 벽면을 민다. 벽이 곧 문이었다.
빛이 새어나오는 틈 너머로 오직 한 테이블만 놓인 공간, 그 앞에는 연극 무대처럼 조명을 받은 오픈 키친이 펼쳐진다.
상상을 테스트하고, 맛을 향한 질문을 던지다
디스프루타의 역사를 상징하는 25가지가 넘는 장대한 코스가 시작되기 전, 레스토랑은 손님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What lies behind our food?'(음식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조리법이나 재료가 아니라, 어떤 감정과 태도로 요리를 만드는가를 묻는 질문지다. 감정, 경험, 창의성, 기억, 우정. 세계 1위 레스토랑이 먼저 꺼내는 말은 기법이 아니라 이 단어들이다.
아홉 가지 허브가 이름표와 함께 접시에 놓여 있다. 이것이 요리인가, 시험인가. 가벼운 토마토 육수 젤라틴 위에 아홉 종의 허브가 이름표와 함께 놓인다. 루꼴라, 와사비 머스터드, 다이콘 크레스, 멜리사, 아지 크레스. 쿄나 머스터드에서 생감자 맛이 나고, 다이콘에서 매운 무 향이 터진다. 허브가 장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경험. 우리가 평소 얼마나 중요한 재료를 무심히 삼켜왔는지 되묻는 시간이다.
이어지는 코스에서 테이블 옆까지 다가온 서버가 트러플 보드카를 따른다. 1리터당 블랙 트러플 80g을 최소 6개월 우린 인퓨즈드 보드카, 37.5도의 알코올을 극저온으로 눌러 점도와 흙내를 전면에 세운 음료다. 이어 나오는 요리는 일본의 감자 전분 투명 시트 18장을 지방으로 한 장씩 적셔 구운 퍼프 패스트리. 원래는 약을 삼키기 위한 용도로 쓰이던 시트의 '사라짐'을 식감으로 전환한 작품이다. 입에 넣자 느껴지던 바삭함이 곧바로 증발하고, 그 빈자리에 부라타와 가을 트러플의 향이 선명해진다. 남겨둔 트러플 보드카를 한 모금 머금으면 모든 미각이 트러플 향 하나로 봉인된다.
'판치노(Panchino)'라고 이름 붙은 코스는 중국식 번(bun)의 구조에서 출발한다. 비발효 도우를 220도 해바라기유에 단 20초 튀겨, 발효빵의 폭신함과 도넛의 쾌감을 동시에 구현한 뒤 그 안에 크렘 프레시와 캐비아를 넣는다. 클래식한 동유럽의 페어링을 수천 킬로미터, 중국식 빵으로 재구성되는 순간이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조합이 완벽한 균형이 느껴진다.
'아마란스 코랄' 코스에서는 '극장'이 열린다. 검은 상자 안, 얇은 크리스털 뒤로 산호 모양 크리스피가 보인다. 식감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는 '상상 테스트' 도 곁들지만, 손을 뻗으면 요리는 그곳에 없다. 광학적 트릭이다. 실제 요리는 보이던 자리의 뒤편에 놓여 있고, 손으로 집어 한입에 털어넣는 순간 아마란스의 바삭함이 먼저 부서지고 캐비아와 굴, 코디움 에멀션이 동시에 터진다. '바다 한 입'이라는 진부한 비유가 나오는 드문 순간이다.
실패를 감추지 않는 레스토랑
더 리빙테이블은 코스 후반, 셀러로 장소를 옮긴다. 서버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 레스토랑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팬데믹 당시 세 셰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는 음식에서는 아방가르드를 추구해 왔는데, 왜 음료는 늘 같은 방식만 반복하는가.'
그래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탈알코올 와인(Dealcoholized Wine)'이다. 19도의 셰리 와인을 지로바프 장비에 걸어, 30도 이하의 진공 상태에서 알코올만 선택적으로 제거한다. 핵심은 '제거'가 아니라 '보존'이다. 와인을 끓이지 않고 알코올만 걷어내, 19%를 3%로 낮추되 향과 산화감, 숙성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린다. 시음해보니 셰리 특유의 너티함과 산미가 오히려 더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디스프루타는 2024년 1월부터 11종의 탈알코올 와인 페어링을 실제 서비스에 올렸다.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누군가는 혁신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와인의 영혼을 훼손했다'며 비판했다. 디스프루타는 지금 이 페어링을 정규 메뉴에서 내렸다. 실패한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이들은 실패를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셀러로 손님을 데려와 실험의 과정, 결과, 그리고 무엇이 부족했는지까지 그대로 공유한다. 그리고 지금은 인류 최초의 알코올 음료였던 미드(Mead)를 꿀이 아닌 파인애플과 바나나로 재구축하는 실험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세계 1위의 자리는 성공의 누적이 아니라 실패를 공유하는 태도에서 온다는 사실을 이보다 선명히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디저트 코스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영화에 한장면으로 들어온듯한 웅장한 음악이 깔리고 조명이 어두워졌다. 서버가 테이블 위의 잔과 그릇을 모두 치우더니 식탁보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것이 '리빙 테이블'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식탁 상판에 숨겨져 있던 서랍과 리프트, 슬라이딩 패널이 하나씩 차례로 열리며, 이끼와 마른 가지, 꽃잎과 솜사탕으로 이루어진 자연 풍경이 식탁 위에 구축된다. 그 사이로 디저트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에는, 손님 중 누군가가 울었다는 후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끼는 영속성, 마른 가지는 계절의 변화, 꽃잎은 감정과 기억. '모든 것은 죽지만 자연은 끝나지 않는다.' 리빙 테이블이 말하는 철학이다.
그리고 다시 질문이 남는다
미슐랭 3스타, 월드 50 베스트 1위라는 타이틀만으로 디스프루타를 설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곳의 진짜 힘은 엘불리의 신화를 박물관에 박제하지 않고 매 시즌 다시 묻는 데 있다. 맛있냐, 아니냐. 세 셰프가 인터뷰에서 반복해 말해온 이 단순한 기준은, 모든 화려한 실험을 버티게 만드는 중심축이다. 디저트 접시가 마지막으로 치워지던 순간, 나는 식탁 앞에서 한 가지를 확신했다. 엘불리는 끝났지만, 엘불리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질문은 바로 이 테이블 위에서 진화하고 있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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