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PKM갤러리 개인전
인체 브론즈 등 90여점 전시
인간 존재의 본질·가치 성찰
"잘 겪은 시련은 아름다워"
폐철근·산불로 불탄 나무…
쓸모다한 재료에 생명 부여
"잘 겪은 시련은 언제나 아름답다."
칠순 조각가 정현은 시련 예찬론자다. 그는 작품에 사용할 재료를 고를 때부터 그 재료가 겪은 시간과 시련을 먼저 살핀다. 드로잉 작업에는 아스팔트 콘크리트에 쓰는 콜타르를 사용하는데, 이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마지막 남은 찌꺼기로 더 이상 쓸모없는 산업 부산물이다. 기찻길에 사용되는 '침목'도 마찬가지다. 인천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탱크나 장갑차를 실은 기차가 천천히 지나가던 풍경을 기억한다. 바퀴가 지나갈 때마다 땅이 푹 꺼졌다가 다시 올라가던 그 리듬을. 침목은 기차의 무게를 수십 년 동안 견뎌내다가 결국 버려진다. 이처럼 폐목·폐철근 등 버려진 물질은 작가의 손끝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에는 199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9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야외 정원에 놓인 대형 조각은 청계천 수표교 주춧돌을 3D 스캐닝 기술로 본떠 만든 작품이다. 수백 년간 돌다리의 무게를 묵묵히 지탱해온 주춧돌처럼, 아무 장식 없는 이 구조물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강원도 산불로 완전히 타버려 숯이 된 나무를 가져와 작가의 손으로 다시 태우고 조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도 있다. 정현이 시련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 또한 누구나 시련을 겪기 때문이다. 그는 다 쓴 재료처럼 아무말 없이 사라지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이 견뎌낸 시간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전시장에는 흙으로 빚은 뒤 청동으로 주조한 인체상이 다수 배치돼 있다. 그는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 감정을 툭툭 던진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삽과 각목, 톱, 헤라(스크래퍼) 등 다양한 도구로 감정의 스펙트럼을 생명력 있게 표현한다. 드로잉은 날것 그대로의 첫 번째 감정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일기와도 같다.
홍익대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작업에만 전념하는 그는 예술가로서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작품이 완판된 것을 시작으로 최근 프리즈 서울에서도 큰 관심을 받으며 '미술관이 사랑한 작가'에서 '시장이 주목하는 팔리는 작가'로 한 단계 도약했다.
그는 지금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금호미술관, 김종영미술관,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 등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 7년간 네 차례 미술관 전시를 통해 대형 작품을 두루 선보였다. 김복진미술상, 김세중조각상,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정현은 이번 전시에서 작업의 시발점이었던 '인물 조각'으로 돌아가 더욱 단순하고 근원적인 형태의 신작을 선보인다. 최근 작업에는 브론즈 인체상에 흰색을 칠해 질감의 표현을 극대화했다.
그에게 질감은 곧 정신이다. "고흐의 그림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의 붓터치 때문입니다. 터치도 질감의 일부죠. 저는 그걸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는 12월 13일까지.
[이향휘 선임기자]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