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핫 마이크 사건’에 낭패 본 트뤼도
뒤끝 심한 트럼프 재집권에 각국 후폭풍
韓 야권 親中 성향 美 정책 기조와 충돌
무역전쟁 등 현실 맞춰 정책유연성 키워야
“‘그’가 40분이나 즉석 기자회견을 하는 바람에 늦은 거예요.” 2019년 12월 초 영국 버킹엄궁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70주년 기념 정상회의 환영식장.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총리에게 늦게 온 이유를 물었다. 당시 48세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친절하게도 마크롱이 ‘그’ 때문에 늦은 거라고 대신 변명해 줬다. “그의 팀원들도 턱이 바닥에 떨어지도록 놀라더라고요”라고도 했다. 꺼진 줄 알았던 마이크를 통해 녹음된 이 대화가 공개되자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나온 ‘뒷담화’에 발끈한 그는 트뤼도를 “위선적인 사람(two faced)”이라고 비난한 뒤 기자회견을 취소하고 런던을 떠났다. 작년 11월 말 ‘캐나다 수입품에 25% 관세’ 발언에 놀라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간 트뤼도는 “미국 51번째 주 주지사”라고 그로부터 조롱당했다. 많은 이들이 5년여 전 일을 가슴에 담아뒀던 도널드 트럼프의 뒤끝이 작렬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나를 ‘한국의 트럼프’라 부른다”고 했다.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이 대표는 여권의 대선주자들 모두와 벌인 조기 대선 가상 양자대결에서 큰 차이로 앞섰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기 대선이 실제 치러질지,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사법리스크를 넘어설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인데도 벌써부터 트럼프의 등장을 은근히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선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에 민주당이 “가치외교라는 미명하에 지정학적 균형을 도외시한 채 북한·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하고,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을 고집하며…”라는 대목을 넣은 건 실수였다. 2차 탄핵안에서 후다닥 뺐지만 이 대표의 “중국에 셰셰” 발언과 함께 ‘친중(親中), 반일(反日) 본능’을 중국을 적대시하는 트럼프 진영에 확실하게 들켰다. 당선 직후 윤 대통령과 5분간 통화할 때 한국의 조선 산업, 선박 건조 능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트럼프의 입에서 요즘 한국 관련 코멘트가 사라진 이유도 이와 관련됐을 수 있다.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예고한 트럼프 2기 정부 4년간 한국은 수출 비중의 약 20%인 대미 수출에선 고율관세, 별도로 20%를 차지하는 대중 수출에선 미국의 반도체 규제 등으로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줄어들 수출을 벌충할 한국의 돌파구로 소형모듈원전(SMR)을 비롯한 원전산업, 군함 건조를 포함한 조선업, 전차·자주포 등 방위산업이 꼽힌다. 셋 모두 미국의 군사·에너지 안보전략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된 분야다. 문제는 세 산업 모두가 이 대표와 거대 야당이 일관되게 거부감을 보여 온 분야란 점이다. 트럼프가 ‘한국 정치권은 못 믿겠다’고 판단하는 순간 관련 산업의 도약도 벽에 부딪칠 공산이 커진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추진해온 국내 정책도 트뤼도의 진보·좌파 정책과 닮았다. 트뤼도 정부는 임기 중 ‘탄소세’를 도입해 많은 반발을 샀는데, 이 대표가 지난 대선 때 자신의 대표공약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 의사를 밝혔던 바로 그 세금이다. 캐나다가 인도적 차원의 이민을 대폭 확대하고도 주택 공급 규제를 확실히 풀지 못해 집값이 폭등한 건 문재인 정부 때 부동산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12월 트뤼도는 ‘트럼프 관세 리스크’에 선제 대응하겠다며 연소득 15만 캐나다 달러(약 1억5000만 원) 이하 국민에게 250캐나다 달러(약 25만 원)씩 나눠준다고 했다가 이에 반대하는 재무장관이 사퇴하는 일을 겪었다. 틈만 나면 전 국민에게 지역화폐로 나눠주자는 이 대표의 민생지원금과 금액까지 비슷하다.
요즘 유럽 좌파 정치인 깎아내리기, 우파 정치인 편들기 놀이에 열심인 트럼프의 ‘퍼스트 버디(절친)’ 일론 머스크가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트럼프 1기 정부 출범 직전인 2016년 말 여론조사에서 캐나다인의 75%는 ‘진보적 가치와 국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트럼프와 맞서야 한다’며 트뤼도를 전폭 지지했다. 지난주 사임 의사를 밝힐 때 지지율은 20% 아래였다. 캐나다인들의 관심사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였다.
트럼프의 시선이 벌써 많이 의식된다면 이 대표는 트뤼도의 ‘핫 마이크 사건’ 교훈을 되살려 “존경한다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식의 꼬투리 잡히기 쉬운 언어습관을 고치는 게 좋겠다. 더욱이 ‘먹사니즘’에 진심이라면 탄핵 정국 와중에 정부의 원전 도입 계획을 축소하는 것 같은 도그마에 빠진 민주당의 정책 기조부터 바꿔야 한다.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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