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무속에 의지한 치료법에 매달렸던 이들이 적지 않다. 무속에 경도된 광해군의 질병관은 기록에도 남아 있다. “상(임금)이 유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좌도(左道)에 심히 미혹했다. 명과학(命科學)과 점술에 능한 정사륜, 환속한 중(仲) 이응두 등이 궁중에 진출해 상을 모셨는데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신임이 두터웠다. 상은 한결같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일이 있으면 길흉이나 금기만 따지는 그들의 말만 들었다. 조회를 하러 정전으로 옮기는 일조차 이들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광해군의 무속 사랑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형제간의 왕위 쟁탈전과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심신의 피로와 고통은 의약이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가해진 엄청난 심적 부담을 극복하려고 발버둥 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서인들과 인목대비가 보내는 노골적인 질시와 저주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었을 터. 그의 병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총애를 받은 무당 복동에 대한 기록에서도 광해군의 무속 질병관을 엿볼 수 있다. “상궁 김씨(김개시)가 왕비(폐비 유씨)를 심하게 투기해 원수처럼 대했다. 그러다 왕비가 병이 들자 의원들은 사악한 귀신 때문이라고 했다. … 복동이 (왕비를) 저주한 사실이 밝혀졌으나 오히려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그 외에도 극단적 성리학 원리주의자였던 인종은 자신의 질환이 깊어가고 처방도 효험이 없자 당시 여염의 무속에서 유행했던 ‘다른 동물(백마 세 필)을 대신 죽이는 의식’을 내전에서 치르기도 했다. 성종이 문성왕묘를 다녀와 병이 심해지자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공묘(孔廟)의 신이 병의 원인이라며 성균관 대성전 뜰 아래에서 무당의 치병의례를 거행했다. 어린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그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무녀를 궁중에 들여 엄동설한에 속옷만 입고 물을 끼얹는 기양의례를 치르다 독감에 걸려 죽었다.
고려 시대에도 무속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는데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통해 “고려인들은 본래 귀신을 경외하고 음양과 꺼리는 금기를 신뢰해 병이 걸려도 약을 먹지 않는다”고 밝힐 정도였다.
이렇듯 질병 치료에 대한 ‘의료’와 ‘무속’의 가치관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의료는 질병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실천을 추구하지만, 무속은 ‘반드시 좋아진다’며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래의 건강은 현재 일상에서 스스로 북돋아 가는 것이지 절대로 누군가 보증해 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건강한 삶은 의사나 영양사 등 전문가의 부분적인 조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식사, 운동, 휴양 등 온갖 생활습관을 종합적, 세부적으로 관리하고 치열하게 실천할 때만이 실현 가능하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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