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과 시선이 완성한 바둑판 위의 사제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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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남자와 어린 청년이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는다. 중년의 남자 옆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가 쌓여갈수록 둘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어느 한쪽을 응원하지도, 패배를 바라지도 못하는 난감한 표정들. 시간이 흘러 승패가 좌우되는 듯한 순간이 다가오고 군중의 얼굴은 다시금 바뀐다. 난감했던 얼굴들에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누가 이겼을까. 아니, 누가 진 것이었을까.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김형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승부>는 조훈현 9단과 그의 제자 이창호의 세기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는 국내외 바둑 대전에서 연승을 거두며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조훈현(이병헌)'이 우연한 기회에 바둑 신동, '이창호(유아인)'를 만나게 되며 시작된다. 그는 중년의 프로 바둑기사들에게도 완승하는 비범한 소년 창호를 제자로 들이고 창호는 스승과 한집에 살며 바둑을 수련하게 된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흐르고 17세가 된 창호는 39세의 조훈현과 마침내 프로 대 프로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창호가 이겨서는 안 되는, 그럼에도 물러설 것 같지도 않은 이 난감한 대국에서 창호는 스승 조훈현을 반집 차이로 이기고 모두를 경악케 한다.

김형주 감독은 전작 <보안관>에서 해고된 전직 경찰이 고향인 부산 기장에서 ‘보안관’을 자처하며 골목대장으로 살아가는 코믹한 이야기로 주목받았다. 잘 만들어진 코미디로 성공적인 데뷔를 했던 김형주 감독은 그의 장기인 코미디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심리 묘사가 두드러지는 드라마 영화 <승부>로 복귀했다.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 각자의 삶 혹은 삶의 배경을 그리는 대신 이들이 만난 이후 서로에게 생기는 변화들, 즉 이들이 만나 바둑을 통해 성장하고 승패의 법칙을 통해 삶의 섭리를 익히게 되는 과정에 집중한다. 따라서 영화의 대부분은 조훈현과 이창호가 서로를 마주하고 집에서나 대국에서나 바둑을 두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이러한 설정에 있어 무엇보다 주연 배우들의 부담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 영화와는 달리 몸을 써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만큼의 긴장감이 이러한 장면들에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둑 매치에서 오는 서스펜스는 오롯이 배우의 표정과 앉은 자세, 그리고 작은 몸짓 등을 통해서만 전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병헌과 유아인은 이 쉽지 않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낸다. 그들이 마주 앉아 대국을 벌이는 장면은 마치 조훈현과 이창호가 치렀던 실제 대국만큼이나 경이로운 연기 대결을 보는 듯하다.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특히 유아인의 활약은 눈부시다. 스승 조훈현의 눈도 직시하지 못한 채 극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야행성 맹수처럼 상대를 살피는 날카로움을 배우 유아인은 섬세하고도 유연하게 표현해낸다. 아마도 <승부>의 가장 큰 성취라면 이러한 캐릭터들의 미세한 몸짓과 시선 그리고 손의 움직임 (특히 바둑 영화라는 특성을 고려했을 때 절대적인 요소라고 생각되는)을 적확하게 설계하고 포착해 낸다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이러한 지점은 영화의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국의 상황, 그리고 바둑을 훈련하는 장면들이 대부분 배우의 표정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대신 실제 바둑판 위의 싸움, 즉 대결의 실제 상황과 설명이 대폭 생략되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이 바둑 경기를 읽는 것을 어려워할 것이라고 판단한 감독의 선택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 영화에서 바둑 경기가 상세히 재현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그렸던 <빅쇼트>처럼 어려운 개념과 상황을 비주얼이나 상황극을 통해 영화적인 장치로 설명했다면 더 흥미로운 재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승부'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결론적으로 <승부>는 간만에 탄생한, 매우 만족스럽고 매력적인 한국 영화다. 영화는 백돌과 흑돌의 싸움을 현재와 미래의 싸움으로, 그리고 예측과 방어의 대결이자 기다림과 선택의 승부로 상징을 더해 확장한다. 앞서 언급했던 유아인의 대단한 연기는 중언부언의 필요가 없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의 귀환을 열렬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승부> 공식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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