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영도구 봉래동 ‘모모스 로스터리&커피바’에 들어서면 유리 통창을 통해 물양장(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이 보인다. 녹슨 선박이 정박된 오래된 항구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액자 같다. 이곳은 과거 피난민촌이었던 영도 바닷가 선박 부품 창고였다. 옛 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내부에는 유명 산업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새하얀 스위스 ‘비트라’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인구 감소가 심각한 부산에 이 카페가 2021년 문을 열어 인적 드물던 영도로 청년을 끌어모으자 부산시는 이듬해 이 지역을 ‘커피 특화 거리’로 지정했다.
미간에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시선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는 왜 커피를 마시는가. 평소 일상에 쫓겨 입속에 약을 털어 넣듯 카페인을 그저 쏟아부었던 건 아닌지. 커피의 맛과 향기와 온도를 섬세하게 음미하며 감각을 깨워보려 했는지. 이제야 커피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아프리카 어느 농장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커피야말로 감각과 상상과 여행의 세계임을 이곳이 새삼 일깨운다.
이 카페에서는 많은 것이 그냥 보인다. 매장 가운데 기다란 바(bar) 형태 조리대에서는 밝고 건강한 표정의 청년 바리스터들이 커피를 내린다. 유리 통창을 통해 드러나는 매장 안쪽 로스터리 공장에서 커피 원두가 공중 파이프라인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도 보인다. 일명 ‘보이는 로스터리’다. 보이는 것은 사무실도 마찬가지다. 1층 매장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2층 ‘보이는 사무실’에 손님들이 매장인 줄 잘못 알고 올라올 정도다. 사무실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천장에는 둥근 달을 닮은 ‘루이스 폴센’ 조명들이 두둥실 달려 있고 직원들이 앉는 의자는 덴마크 ‘칼한센앤선’ 브랜드의 ‘CH24 위시본 체어’다. ‘커피에 진심’인 만큼 ‘가구에도 진심’인 회사인 게다. 그렇게 모든 게 투명하게 담겨 나오는 커피 맛을 사람들은 알아봤다.
모모스커피는 ‘찐’ 부산 커피다. 이현기 모모스커피 대표(47)가 2007년 부산 금정구 부곡동 온천장역 앞 부모님 식당 앞 네 평 창고에서 시작했다. 부산의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고속철도 회사를 다녔던 그는 오랜 꿈이었던 사업을 하고 싶어 다시 경영학을 배웠다. 그리고 서른 살에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직원 월급도 주기 어려울 만큼 고전했지만 오로지 커피 품질만 생각하면서 매진한 결과 지금은 영도 로스터리&커피바(2021년), 해운대 마린시티점(2024년), 도모헌점(2024년) 등 부산에서 네 개의 ‘스페셜티 커피’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15개국 100여 개 농장에서 원두를 들여오며 지난해 기준 연 매출 200억 원, 연간 방문객은 120만 명이다.이 대표의 부모님 식당은 결코 거창한 곳이 아니었다. 부산 남구 문현동 판자촌에서 태어나 단칸방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는 이 대표는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179번 버스를 타고 온천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학교를 마치고 찾아가 보니 빨간색으로 크게 ‘보신탕’이라고 쓰인 식당이었다. 부모님의 식당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당시 온천장역 콩나물을 키우던 폐공장으로 옮겨왔고 이 대표는 이 식당 앞 작은 창고에서 커피 사업을 시작했다. 이 대표는 말한다. “어린 시절 ‘보신탕’이라고 적힌 집으로 들어가는 게 참 부끄러웠다. 긴 세월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고생하시다가 결국 폐업까지 했을 때 부모님의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옛 식당 입구의 흔적을 싹 다 지우고 싶었다. 못난 자존심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렸다. 감사한 마음 대신 오만함이 가득했다. 이제 당시의 부모님 나이가 돼 보니 이렇게 커피로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버팀목이 부모님이었음을, 부모님이 옛 식당에 심은 대나무숲이었음을 깨닫는다.” 지금의 모모스커피 온천장 본점은 옛 식당뿐 아니라 인근 건물들을 사들여 계속 확장 중이다.모모스커피를 생각하면 ‘도전’과 ‘성장’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족 같은 끈끈한 조직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장이다. 2007년 창업 당시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를 시작한 전주연 씨(37)는 부단한 도전 끝에 2019년 한국 최초의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이 됐고 현재는 모모스커피의 공동 대표다. 창업 초기 한 단골손님은 ‘커피가 좋아’ 입사해 이제는 임원이 됐다. 모모스커피는 사업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기업부설 연구소를 세워 커피 연구에 매달렸다. 이 대표가 새로운 해외 커피 산지를 개척하러 다닐 동안 직원들은 국내 시장을 단단히 키웠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떤 기업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공동의 문제의식과 도전이 신뢰를 바탕으로 한 성장을 이끌었다.모모스커피는 지난해 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한 해운대 마린시티와 옛 시장 관사를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도모헌’에 매장을 잇달아 냈다. 브랜딩 전문기업 켈리타앤컴퍼니와 손잡고 브랜드 아이덴티티(BI) 작업도 했다. 비전은 ‘특별함을 모두에게(Specialty for All)’. 커피를 즐기는 사람뿐 아니라 커피를 만드는 모두의 삶이 함께 행복하길 희망하며 커피의 본질에 깊이 다가가 다양한 문화를 통해 더 큰 가치를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점포별 특색을 담은 각각의 이미지로 컵과 드립백을 디자인해 ‘스페셜티 커피’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디자인페스티벌, 서울카페쇼 등과도 협업한다. 부모님이 옛 식당 즉, 모모스 본점의 터에 직접 가꿨던 정원의 정신을 생각하며 ‘모두의 정원’이라는 콘셉트로 누구든 즐기고 쉬어가는 매장의 정원들도 늘려 나가고 있다.
‘모모스’는 무슨 뜻일까. 2000년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보보스’(Bobos·물질적 풍요와 보헤미안의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누리는 상류계층)라는 말을 사용한 후 유럽에서는 ‘모모스’(Momos)라는 마케팅 신조어가 따라 유행했다고 한다. 상업주의를 배척하고 실용성과 윤리적 가치를 즐기는 당시 청년세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3만km를 주행해 가끔 시동이 꺼지는 승용차를 아직도 운전하는 이 대표가 커피와 공간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을 보면 ‘모모스커피’는 역시 ‘모모스’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부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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