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조각가, 훌훌 벗고 날아오르다 [국현열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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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의 ‘비상’(1983). 1950년대부터 시작한 작가의 조각세계는 1960년대 후반부터 ‘비상’이란 주제로 집약됐다. 반세기에 걸친 예술작업의 완성이자 작가가 평생을 추구했던 초월적인 것에 대한 염원을 응축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가장 추상적인 외양을 가진 ‘비상’ 연작은 1970년대 처음 발표한 이후 타계할 때까지 작가의 만년에 걸쳐 오랫동안 이어졌다. 덕분에 양적으로 가장 풍부한 작업이기도 했다. 수평·수직으로 다채롭게 형상화한 날개는 초월, 상승, 자유의지 등을 상징하며 약동, 충만, 휴식 등을 변모한 최소한의 조형 요소로 표현했다. 구리, 55.5×98.4×17.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여성 조각가’ 하면 누구를 떠올릴 수 있을까. 로댕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카미유 클로델(1864∼1943), 거대한 거미조각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 정도가 아닐까. 미술사에서 여성 조각가는 드물다. 회화가 귀부인의 교양으로 어느 정도 허용됐다면 육체적 노동이 뒤따르는 조각은 여성에게 훨씬 더 높은 장벽이었다. 하물며 교육환경이 서구보다 척박했던 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 황량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 이가 있었다. 한국 현대조각의 새로운 길을 연 선구자, 김정숙(1917~1991)이다.

김정숙은 여인의 몸과 모성을 즐겨 조각했다. 여성 미술가가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어쩌면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를 작품으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에게는 마땅히 남성의 몸보다 여성의 몸이 더 친숙했고 어머니로서 모성의 경험도 깊었다. 그렇게 그는 자칫 평범하게 보일 수 있는 소재를 추상의 언어로 새롭게 빚어냈다.

광복 이후 한국미술이 추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김정숙은 그 선두에 섰다. 구체적인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을 고수하던 당시 조각계에서 그의 실험은 독보적이었다. 눈·코·입을 묘사하는 대신 유려한 선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었고, 공간을 활용해 ‘비어 있는 볼륨감’을 창출했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재료와 기법으로 반복 제작하며 더 완전한 형태를 찾아갔고, 대리석·나무·청동 같은 전통적 재료를 매끄럽게 다듬어 완결성을 높였다.

김정숙의 ‘엄마와 아기들’(1965). 삼남매의 어머니였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엄마와 아이들의 신체·동작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한몸을 이룬 형태로 제작됐다. 빈공간을 그득하게 채운 양감, 유려한 곡선의 인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어린 자녀들을 남겨 두고 홀로 미국에 건너갔을 때 작가는 호숫가에 앉아 백조를 바라보다가 아이들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모자상 연작이 탄생한 배경이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렸다. 나무, 99×28×2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유려한 선, 매끈한 단면…덩어리와 빈공간 맞물린 부피감도

김정숙은 “예술가는 작품을 낳는 어머니와 같다”고 말했고, “사랑하는 작품을 볼 때마다 ‘왜 나를 불완전하게 만들었느냐’는 원망이 들려온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끊임없는 성찰 속에서 그의 조각세계는 완성됐다. 덩어리와 빈공간이 맞물린 부피감, 끝까지 다듬은 매끈한 표면, 세련되고 온화한 추상의 형태. 이것이 김정숙의 시그니처였다.

작품으로만 보면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김정숙은 1917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시절은 어려웠어도 서울 을지로에서 한약재 무역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3학년 때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영어도 배우며 다시 공부할 날을 기다리고 준비했다. 남편 또한 언젠가 꼭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돕겠노라 약속했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49년 막 문을 연 홍익대 조소과 1회 입학생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서른셋에 세 아이의 어머니였던 김정숙이 체력 소모가 큰 조각을 선택한 것은 그 자체로 도전이자 용기였다. 대학에서 구상조각을 배우며 기초를 다졌고 누구보다 성실히 작품에 매달렸다. 그런 그를 어린 동급생들과 젊은 교수들은 ‘마담 조각가’라 불렀다.

조금씩 공부해 둔 영어도 쓰임이 생겼다. 1955년에는 한미재단 유학 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다. 아이들 곁을 떠나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크랜브룩예술아카데미로 건너가 현대 조형언어를 새롭게 익혔다. 당시만 해도 서양미술은 잡지·신문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고 유학을 가더라도 대부분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런 가운데 김정숙은 현대미술의 중심, 미국으로 간 최초의 조각가가 된 것이다.

김정숙의 ‘여인흉상’(1980). 매끄러운 선의 흐름, 묵직한 청동의 양감이 빈공간과 조화를 이루며 우아한 율동감을 자아낸다. 날렵한 턱을 거쳐 부드럽게 파인 목선을 지나 풍만한 가슴까지, 간결하지만 기품있게 흐르는 인체상은 작가의 여인상·모자상이 가진 특징이다. 사랑, 모성, 생명, 자애 등 작가가 경험하고 소중히 여긴 감정을 실어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청동, 43.5×24×16.5㎝(좌대 9×22.5×15㎝).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미국 교수들의 수업 방식은 한국과 달랐다. 세세한 묘사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다양한 돌을 보여주며 형태와 질감이 주는 느낌을 묻는 식이었다. 김정숙은 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생각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상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더불어 철 용접을 비롯한 다채로운 재료와 제작방식을 익혔다. 짧지만 치열했던 유학기간, 그는 “국가의 대표로 뽑혔다”는 자부심과 “많이 배워 한국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학업에 전념했다.

1956년 가을 귀국한 김정숙은 홍익대 강사로 부임해 여성 최초의 조각과 교수가 됐다. 미국에서 배운 철조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용접 기법을 가르쳤다. 찰흙을 이용한 인체 모델링이 일반적이던 시절, 국내 미술대학에 처음으로 개설한 철 용접 실기실이 생긴 것이다. 브론즈 착색법, 칠보 공예를 응용한 조형 연구, 테라초 기법 등을 전수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세계적인 조각가들을 만나 얻은 자료와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했고, 미국문화원이나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빌려 보여주며 폭넓은 교육을 제공했다.

당시 이렇게 다양한 자료를 생생하게 사용하는 수업은 흔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이경성(1919∼2009)은 이런 김정숙을 두고 “조각가는 주위 모든 재료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국내에 처음 알린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조각가 김정숙. 작업실에서 마무리작업 중인 모습을 사진작가 임응식(1912∼2001)이 촬영하고 ‘김정숙 인물’(1970)이란 제목을 달았다. 인물보다 작품을 크게 부각해 작가의 제작 열의까지 담아내려 했다. 종이에 젤라틴실버프린트, 31×2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자들은 김정숙을 “어머니 같은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열정적으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토론을 열고 유학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등 늘 따뜻하게 품어줬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이 빈공간으로 주변을 감싸듯 그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제자들을 품었다.

생의 후반기인 1968년부터 1990년까지 김정숙은 그의 대표작으로 남은 ‘비상’ 시리즈에 몰두했다. 수평으로 날아가는 날개, 꼬여 교차하는 날개 등 다양한 날개의 형태로 추상화한 작품을 제작했다. 김정숙은 이 연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회 일선에서 남성과 대등하게 일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훌훌 벗고 날고 싶다는 바람을 날개로 표현한 것이다.”

찰흙 모델링 시절 홍익대 미대에 철 용접 실기실 처음 만들어

김정숙의 고백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창작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각 분야에서 가장 먼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미술대학 조각과의 첫 번째 여성 교수였으며, 국내에서 용접 조각 과목을 처음 개설했던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한국 최초’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해도, 아니 어쩌면 그 때문에 더 외롭고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1974년 김정숙은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창립하고 주말마다 회원들을 불러 현대조각 관련 슬라이드를 함께 보며 토론을 이어갔다. 서로에게 자극과 격려를 주고, 철저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한 여성 조각가를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주말을 고집한 것은 가족에게 아내와 엄마의 정체성을 ‘조각가’로 각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김정숙의 ‘비상’(1985). 묵직한 대리석에 실어낸 가벼운 날갯짓. 날아오르기 직전 새의 날개를 형상화했다. 부드러운 곡선, 매끄럽게 마감한 단면, 세련된 형태와 균형감이 절정의 감각을 보여준다. 인체조각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단순한 형태로 응축한 추상조각으로 발전해간 작가의 작품세계는 날개를 모티프로 자유, 초월, 상승에 대한 염원을 담은 ‘비상’ 연작에 귀결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대리석, 104×74×36㎝(좌대: 30×31.5×28㎝).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김정숙은 1985년 ‘제17대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수상소감으로 그는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상”이라 운을 뗀 뒤 예술과 가정의 완벽한 병행은 허상이라 고백했다. 자신은 가정과 아이들을 희생시켰지만 “그럼에도 최선으로 노력했다는 점만큼은 자신 있다”고 덧붙였다. 작품에서 완벽을 추구했듯 시대착오적인 사회 속에서도 자기 인생의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하고자 애쓴 삶이었다는 말이리라.

한국 현대조각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이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교육자. 김정숙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최초’라는 타이틀을 넘어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재료, 표현방식, 작가의 성별 모두에서 더욱 다채로워진 동시대 한국미술을 누린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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