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 오닐 "비올라 무시하면 음악으로 증명하죠"

4 days ago 8

[arte] 허세민의 인터미션
타카치 콰르텟 멤버이자 솔로 연주자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인터뷰
"비올라는 새로운 가능성 많은 악기"
"연주자는 단지 음악의 하인일 뿐"

1980년대 미국 워싱턴주의 외딴 시골 마을.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 선 채 더 큰 세상으로 떠나는 버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작은 소년이 있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지금, 소년은 비행기를 제 집 삼아 세계를 누비는 최고의 비올리스트가 됐다.

끊임없는 투어 일정으로 몸은 고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어릴 적 꿈꾸던 버스를 타고 달리는 것 같아 행복하다"며 소년처럼 웃어 보이는 연주자. 세계적인 현악 사중주단 '타카치 콰르텟'의 멤버이자 독보적인 솔로 비올리스트인 리처드 용재 오닐(48)을 최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만났다.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 앞서 연주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 앞서 연주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콰르텟 일정만으로도 바쁠 텐데 매년 한국을 빼놓지 않고 찾고 계십니다. 현재는 미국 콜로라도주에 살고 계시죠?

"네. 산중턱에 있는 동네에서 살고 있어요. 한국에 올 수 있는 건 무엇보다 콰르텟 멤버들이 한국에 오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멤버들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보내줘요.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멤버들도 잘 알고 있거든요. 콰르텟 일정이 70%에 달하지만,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국에서 관객들과 만나려고 해요."

▶타카치 콰르텟 창단 멤버인 첼리스트 안드라스 페예르가 오는 8월 은퇴하고, 새 멤버(첼리스트 미하이 마리카)가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큰 변화를 앞두고 계신데, 어떤 기분이신가요?

"제가 이 콰르텟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가 안드라스 때문이었어요. 안드라스는 헝가리 출신인데, 우리가 잘 아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처럼 헝가리 음악가들에겐 헝가리 혁명 이후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음악적 전통이 있거든요.

안드라스와 함께 하며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과 같은 고전 레퍼토리를 이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깊이로 배울 수 있었어요. 제가 배운 걸 팀에 전하고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도전적인 여정이 되겠지만 신선한 변화가 될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안드라스에게 많은 것을 배우셨다고 했는데요.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가장 깊이 마음에 새긴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술에서 경직됨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Rigidity is the death of the art form)'는 가르침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음악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지 않거든요. 안드라스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했어요. 음악보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도 그에게 배운 소중한 가르침이에요.

요즘 연주자들은 음악보다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쉬운데요. 사실 우리는 그저 음악의 하인(Servant)일 뿐이에요. 음악가들이 연주할 때 해야 할 일은 작품과 작곡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50년 넘게 활동한 안드라스는 지금까지도 이걸 첫 번째 원칙으로 지키고 있어요."

▶앞으로 타카치 콰르텟의 방향성과 계획도 궁금합니다.

"타카치 콰르텟은 역사적으로 베토벤과 버르토크 작품 연주에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어요. 동시에 저희는 현대 작곡가들의 신작을 무대에 올리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그래서 다음 시즌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가브리엘라 레나 프랭크(Gabriela Lena Frank)의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에요. 얼마 전 퓰리처 음악상을 받은 정말 뛰어난 작곡가예요."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5월 26일과 30일 피아니스트 박종해와 한국에서 공연하는 작품도 소개해주세요. 작년과 달리 2부에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사단조, Op. 19)을 선곡한 게 눈에 띄네요.

"라흐마니노프는 제가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에요. 사실 비올라는 수많은 장점을 가졌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라흐마니노프 음악처럼 풍성하고 극적인 낭만주의 레퍼토리가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거장들이 비올라를 위한 독주곡을 남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를 비올라 버전으로 편곡해 연주하게 됐어요. 전 다시 태어나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데요. 비올리스트인 제가 피아니스트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라흐마니노프 소나타를 연주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나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니, 농담이시죠?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협연 무대에서 피아노 바로 옆에 서서 연주하다보면, 정작 그 악기에 대해선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피아노를 제대로 알면 음악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질 수 있겠죠.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연습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다음 생에 해보겠다'고 한 거예요. 이번 생은 비올라와 함께 해야죠.(웃음)"

▶그래미어워즈에서 '베스트 클래식 기악 독주상'(2021년)을 수상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당시 수상 소감으로 "오늘은 비올라에 위대한 날"이라고 말씀하신 게 여전히 인상 깊어요.

"당시 함께 후보에 올랐던 피아니스트들만 해도 다닐 트리포노프, 이고르 레비트 같은 쟁쟁한 연주자들이었어요. 사실 비올라가 피아노를 제치고 상을 받는 건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해 그래미가 저를 선택해줬고, 너무나도 큰 영광이었어요.

그때 코로나19로 시상식에 못 가고 집에 혼자 있었는데요. 화상 연결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나서 제가 뭘 했는지 아세요? 삽을 들고 나가서 집 앞에 쌓인 눈더미를 치웠어요. 너무 흥분되고 감격스러워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거든요.(웃음)"

▶세계적인 콰르텟의 멤버이면서 독주자로도 인정받는 연주자는 드문데요. 스스로 생각하는 나만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단지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좋아하는 걸 일찍 발견했고, 다행히 소질도 있었으니까요. 요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정말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다 보니 한 우물만 파기 어려워졌잖아요.

그에 반해 저는 한 가지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죠. 같은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걸 지루해하지 않는 성향도 음악가로서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전 매일 똑같은 식당에 가서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전혀 질려하지 않는 스타일이거든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난 19일 서울 통인동 크레디아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긴 세월 함께해올 수 있었던 비올라의 매력은 뭔가요?

"음악 안에서 비올라가 맡은 독특한 역할을 좋아해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기존의 곡을 비올라로 재해석하거나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1년 내내 세계를 돌며 연주하는 건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렇지만 50살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전 여전히 이 악기를 사랑해요. 비올라와의 교감도 지금이 가장 깊고 단단한 시기인 것 같아요."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의 중간 음역을 담당하잖아요. 그래서 비올라를 깎아내리는 일부 편협한 시선도 존재하는 것 같아요. 젊은 비올리스트들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8년 전 독일 뮌헨에서 녹음하던 중이었는데 지휘자가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군요. '재능도 뛰어난데 왜 '진짜 악기'(real instrument)를 연주하지 않냐'고요.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조롱할 때 반응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화를 내며 맞받아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순간 상대의 말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꼴이 돼요. 그런 교양 없는 말은 무시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을 통해 그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면 되죠."

▶언젠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한국인 음악가가 있나요?

"기회가 된다면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함께 무대에 서면 즐거울 것 같아요. 제가 나이가 들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그에겐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요."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숨 가쁘게 달려오셨습니다. 앞으로 연주자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얼마 전까지도 제 삶의 최우선 순위는 음악이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가 들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연주자 뒤에는 결국 한 명의 '인간'이 존재하는 거잖아요.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음악도 계속할 수 없어요. 이제는 삶의 밸런스를 맞추고 스스로 돌보는 데 집중하려고 해요."

글=허세민 기자, 사진=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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