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의 설경과 아르헤리치…'르 피아노 심포닉'의 무한대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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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리옹 역을 떠난 고속 열차는 세 시간 남짓 달려 스위스 바젤에 오차 없이 도착했다. 바젤에서 루체른행의 스위스 내선 기차를 타고 바라보는 풍경은 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기차는 한 시간쯤 가서 루체른에 도착했다. 여름에는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호숫가가 반겨주던 도시 루체른, 겨울이 오니 설경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올해로 제5회를 맞는 ‘르 피아노 심포닉(Le Piano Symphonique)’은 겨울에도 루체른이 클래식 음악의 도시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도록 했다. 지난 4년 동안의 지속적인 성장에 힘입어, 1월 12일부터 18일까지 일주일간 열린 이번 2026년 에디션에서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닌 정체성과 확장 가능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르 피아노 심포닉은, 피아노를 단순한 독주 악기로 한정하지 않고 피아노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점을 그 시그니쳐로 한다. 이를 위하여 각 이브닝 프로그램은 의도적으로 ‘제1막(Premier acte)’과 ‘제2막(Deuxième acte)’으로 나뉘어 기획되며, 피아노가 지닌 세 가지 측면 즉, 교향적 성격, 실내악적 친밀성, 솔로 악기의 자유로움이 상호 유기적으로 공존한다는 점을 한 무대에서 소개함으로써 관객에게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제공한다.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중 샤가예그 노스라티의 공연 장면(1원15일, 슈바이처호프 호텔)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중 샤가예그 노스라티의 공연 장면(1원15일, 슈바이처호프 호텔)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이번 에디션 역시 르 피아노 심포닉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상징적 존재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간판스타로 등장하여 라인 업을 이끌었고, 페스티벌은 다시 한번 파워 브랜딩을 자랑했다.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을 중심축으로, 엘렌 그리모,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다비드 프레이, 장 롱도, 알렉산드라 도브간 등 각기 다른 음악적 개성을 지닌 연주자들이 대거 합류, 세대를 아우르는 풍성한 스펙트럼을 형성했다. 일주일간 치러진 페스티벌 기간 중 하이라이트였던 1월 16일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의 공연 현장 및 바그너가 머물렀던 임시 거처로 유명한 슈바이처호프에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의 분위기를 공유한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친구들과 함께한 훈훈한 밤

KKL 루체른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연장의 분위기는 이미 고조되어 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이 이 특별한 이브닝 콘서트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르 피아노 심포닉을 대표하는 ‘건반의 여신’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드디어 등장하자 무대와 객석은 환하게 빛났다.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왼쪽부터] 미샤 마이스키와 마르타 아르헤리치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왼쪽부터] 미샤 마이스키와 마르타 아르헤리치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아르헤리치는 베토벤과 드뷔시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오랜 친구들과 이번 무대에서 함께 만났다. 첫 번째 파트너는 첼로와 피아노 듀오 레퍼토리에서 그녀와 함께 수많은 명연을 남긴 미샤 마이스키였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Op.5 No.2'에서 종종 불안정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이스키는 아르헤리치라는 든든한 동반자 덕분에 끝까지 흐름을 유지해 나갔다. 이 작품에서 주도권은 분명 아르헤리치에게 있었고, 두 연주자는 베토벤 음악 안에서 오래전부터 드나들던 ‘자기 집’에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주었으며, 수십 년 쌓아온 앙상블의 기억이 이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주었다.

이어 등장한 네덜란드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과의 듀오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관능적인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비슷한 기질을 지닌 두 연주자의 무대 위 존재감은 마치 ‘어머니와 딸’을 연상시켰다. 베토벤의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이들은 각자의 해석을 자유롭고도 대담하게 펼쳐 보였고, 음악은 장난기 어린 시선과 따뜻한 교감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때로는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순간이 자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르헤리치는 스타인웨이와 완전한 일체가 되어 있었고, 얀센 역시 자신의 바이올린과 하나가 된 모습이었다. 마침내 두 연주자는 일종의 황홀경 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되었고, 서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긴장을 이어가다가도 조화롭게 다시 만났다.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왼쪽부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재닌 얀센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왼쪽부터]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재닌 얀센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마르타 아르헤리치(상단)와 스티븐 코바체비치(하단)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친구들> 공연 장면. 마르타 아르헤리치(상단)와 스티븐 코바체비치(하단)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스티븐 코바체비치와의 듀오는 또 하나의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그는 오랜 음악적 동반자이자, 아르헤리치의 둘째 딸 스테파니 아르헤리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드뷔시의 '흑과 백'과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두 사람이 수없이 함께 연주해 온 레퍼토리다. 무대 위에서 아르헤리치는 파트너가 피아노로 안전하게 다가가 편안히 자리에 앉도록 세심하게 배려했고, 이러한 따뜻한 배려는 연주 내내 이어졌다. 86세 코바체비치를 향한 그녀의 시선, 파트너의 소리를 덮지 않으려는 음량 조절, 그리고 템포에 대한 세심한 배려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신뢰와 존중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85세의 거장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여전히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며 동료 연주자들과 KKL 루체른의 객석을 환하게 비추었고, 관객들은 최고급 샴페인처럼 우아하고 찬란하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순간을 만끽하며 행복한 모습이었다.

피아노 레퍼토리의 숨겨진 보석들

루체른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1866년부터 1872년까지 약 6년간 머물렀던 도시이기도 하다. 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바그너는, 이 도시의 고요함 속에서 위안과 안식을 얻으며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코지마(Cosima Wagner)와 결혼한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친구였던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또 다른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루체른 호숫가의 저택 트립쉔(Tribschen)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꾸몄으며, 결혼식 이전 바그너가 머물던 곳이 바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슈바이처호프 호텔(Hôtel Schweizerhof Luzern)이다.

올해 르 피아노 심포닉 페스티벌 기간 매일 정오에 열렸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는 바로 이 슈바이처호프에서 진행되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연주자들이 숨겨진 보석 같은 레퍼토리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 약 한 시간 동안 선보이는 이 시리즈는, 친밀한 분위기의 살롱 음악회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콘셉트로 기획되었다.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공연 장면. 1월 15일 무대에 오른 연주자 샤가예그 노스라티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공연 장면. 1월 15일 무대에 오른 연주자 샤가예그 노스라티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1월 15일 무대에 오른 연주자는 샤가예그 노스라티였다. 바흐의 '파르티타 2번'과 하이든의 ‘안단테와 변주곡’에서 절제된 우아함으로 고전적 정서를 차분히 전달한 노스라티는, 마지막 곡 샤를 발랑탱 알캉의 '피아노 솔로를 위한 교향곡 Op.39'에서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켰다. 혼신을 다한 연주로 하나의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에 필적하는 위용과 권위를 발휘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 노스라티는, 알캉의 작품을 통해 피아노가 지닌 광대한 음향적 스펙트럼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공연 장면. 1월 16일 무대에 오른 연주자 로만 보리소프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제5회 르 피아노 심포닉의 피아노 독주회 시리즈 공연 장면. 1월 16일 무대에 오른 연주자 로만 보리소프 / Credits: Luzerner Sinfonieorchester © Philipp Schmidli

1월 16일에는 로만 보리소프가 ‘마주르카’를 중심 테마로 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섬세한 터치로 시작된 쇼팽의 마주르카 4번은, 이어지는 클라라 슈만, 고도프스키, 리아도프의 마주르카 작품들로 점차 사운드를 확장해 나갔다. 프로그램의 정점은 로베르트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으로, 다시 한번 피아노가 지닌 교향적 사운드의 가능성을 인상 깊게 드러냈다.

1월 17일 무대는 안드라스 쉬프가 높이 평가한 그리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필 리오티스가 맡았다. 프로그램의 중심 아이디어는 포크 뮤직이 클래식 피아노 음악의 사운드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조명하는 데 있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는 남미적 색채와 엇박자가 만들어내는 재즈 리듬 특유의 스윙이 살아났고, 브람스의 ‘왈츠 Op.39'에서는 우아한 빈 무도회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어진 슈만의 ‘사육제’는 성격 소품의 대가인 슈만 음악 세계의 정수를 응축해 보여주었다.

슈바이처호프에서 열린 살롱 음악회 시리즈는, 숨겨진 보석 같은 피아노 작품들을 통해 ‘악기의 왕’으로 불리는 피아노가 지닌 사운드의 영역이 얼마나 다채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흥미로운 기회였다.

루체른=박마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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