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근로자 1만 명당 산업용 로봇 1220대가 설치되어 있다. 세계 평균(132대)의 아홉 배가 넘는 수치로, 국제로봇연맹(IFR)이 매년 발표하는 로봇밀도 순위에서 부동의 세계 1위다.
이 로봇들은 자동차 공장의 차체 용접 라인에서,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에서, 디스플레이 공장의 패널 이송 공정에서, 배터리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물류센터에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런 우리나라가 최근 그 로봇을 둘러싸고 예사롭지 않은 통상 마찰을 겪고 있는 중이다.
왜 지금, 로봇인가
정부는 지난 3월 일본·중국산 산업용 로봇에 최고 19.85%의 덤핑방지관세를 확정했다.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주요 무역상대국인 중국과 미국, 일본이 모두 얽혀 있다.
2024년 기준 중국은 30만대에 가까운 로봇이 설치된 세계 1위의 로봇시장이다. 일본, 미국, 우리나라, 독일이 각각 2만대에서 4만대 사이로, 2~5위를 모두 합쳐도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에 기대 막대한 보조금을 등에 업고 로봇을 과잉생산해왔다. 내수는 정체됐고 재고는 쌓였다. 원래 갈 곳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미·중 무역분쟁으로 미국행 수출길이 막히자, 밀어내기 물량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했던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에 기존 한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까지 시장점유율 방어를 위해 낮은 가격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사태가 커졌다.
핵심 부품 가격은 올랐는데 판매가격은 오히려 깎아야 하는 국내업체들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는 로봇을 미래 제조업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로 규정하고, 국내 로봇산업의 기반이 무너지면 제조업 전체가 외산 로봇에 볼모로 잡힌다는 판단 아래 관세 카드를 꺼냈다.
복잡해진 반덤핑관세의 그물
문제는 부과 대상 품목 정의가 지나치게 복잡하다는 점이다. ‘가반중량 6~600kg, 4축 이상 수직다관절’이라는 기본 정의에 협동로봇, 소형고속로봇, 도장전용로봇, 양팔로봇 네 갈래는 다시 복잡한 정의를 붙여 부과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복잡함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일본의 로봇제조사가 선임한 로펌은 부과대상에서 자사 모델을 하나라도 더 빼기 위하여 자사 모델의 여러 가지 특성을 들이대며 자사 모델은 국내 생산제품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국내 로봇제조사들은 그것은 미세한 사양 차이에 불과하며 그 정도의 제품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생산 가능하다고 맞섰다. 그 사이에서 로봇을 설비로 쓰는 다른 국내업체들은 반덤핑관세 부과에 따른 원가 상승을 막아달라며 또 다른 목소리를 냈다.
세 갈래 이해관계의 충돌을 정부가 정교하게 조율한 결과가 지금의 부과대상 품목의 정의다.
정교함의 역설과 우회덤핑방지 제도
그런데 이 정교함 자체가 위험 요인이다. 로마법 격언에 ‘하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이다(expressio unius est exclusio alterius)’라는 말이 있다. 품목을 좁고 세밀하게 정의할수록, 그 경계 바로 바깥에 합법적인 우회로가 뚫린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가 중국산 열간압연 후판을 부과 대상으로 정의하자, 업체들은 표면에 페인트만 얇게 발라 무관세 품목인 ‘컬러강판’으로 신고해 통관시킨 뒤 국내에서 다시 페인트를 벗겨 유통했다. 활엽수 합판을 부과 대상으로 정의하자, 업체들은 내부는 활엽수 그대로 두고 겉면에만 얇은 침엽수 단판을 덧대 ‘침엽수 합판’으로 품목코드를 세탁했다.
로봇의 부과대상 품목의 정의가 과거 철강·합판보다 훨씬 세밀하고 예외도 많다. 반덤핑관세를 합법적으로 우회할 수 있는 공간이 넓게 열려 있는 셈이다.
이를 막을 장치가 우회덤핑방지 제도다. 관세법 제56조의2가 2025년부터 시행되면서 수출국 내에서 반덤핑관세 부과대상 물품에 대한 물리적 특성·형태의 경미한 변경을 통한 관세 회피를 규제 대상으로 삼았다. 경미한 변경을 통하여 반덤핑관세 부과대상에서 빠져나가는 물품에 대하여 별도로 우회덤핑조사를 하여 동일하게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시행령을 고쳐 2026년부터는 수출국 뿐만 아니라 제3국과 국내 보세구역을 경유한 조립·완성 행위까지 규제 범위를 넓혔다.
한국은 원래 반대편에 있었다
흥미로운 건 한국이 불과 얼마 전까지 우회덤핑 방지 제도의 국제적 도입을 정면으로 반대해온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일본·홍콩과 함께 우회덤핑 국제규범화에 반대했고, 결국 국제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96년 미국이 한국산 컬러TV의 멕시코 우회수출을 문제 삼아 조사했을 때, 한국은 그것이 우회덤핑이 아니라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에 따라 멕시코를 생산기지로 활용한 정당한 통상전략이라고 항변해야 했던 트라우마가 있었다. 우회덤핑 규제가 국제규범이 되면, 해외로 생산기지를 넓혀가던 한국 기업들이 언제든 그 표적이 될 수 있었다.
다자주의의 종언
그런 한국이 정반대로 입장을 바꿨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며 세계 공급망이 진영별로 갈라지고, 각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우선하는 신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다자무역 질서의 최대 수혜국이었던 한국도 그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핵심 제조업의 기반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
이 장면은 산업용 로봇 하나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세계무역기구(WTO) 다자체제가 30년 가까이 합의하지 못했던 우회덤핑 규범을 각국이 개별적으로 법제화하고 있다는 것은, 다자주의가 사실상 작동을 멈췄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후 자유무역 질서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이 흐름에 동참했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이다.
다자주의가 약속했던 규칙기반 질서는 각자도생의 논리로 대체되고 있고, 한국도 그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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