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계 각국의 물밑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한국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산업 지원대책은 ‘맹탕’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부는 27일 경기도 성남시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서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산경장)를 개최하고 △내년 14조원 규모의 정책금융 지원과 △투자세액공제율 상향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의 인프라스트럭쳐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추가 반도체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반도체 초격차 기술 확보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된다는 취지에서 5개월 만에 추가 지원대책을 내놓은 것이지만, 주요 경쟁국이 시행하는 보조금 직접 지원은 빠졌고, 앞서 발표된 지원책을 다시 끌어다 쓰는데 머물렀다는 평가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글로벌 반도체 기술 패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주요국들처럼 직접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미국은 반도체법 제정으로 약73조원 규모의 보조금과 대출, 보증 재원을 마련했고, 일본은 반도체산업 기반 긴급강화 패키지를 통해 약 15조원 규모의 제조시설 보조금 재원을 조성했다. 반도체 보조금을 통해 미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국내 기업들을 안방으로 끌어들였고, 일본은 TSMC 투자 확대를 이끌어 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세액공제로도 충분한 규모의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조금 형태의 직접 지원은 신중한 입장”이라며 “업계와 정치권, 연구기관의 의견을 잘 알고 있고, 단계적으로 판단해 지원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면 보완하겠다”고 설명했다.
김현재 연세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그러나 “반도체산업은 외교, 국방, 경제의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민간 만의 영역이 아니다”라며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도태되는 것은 한순간인데, 직접 보조금 등을 망설이는 것은 심각한 무책임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방안에는 대출을 통해 기업들 투자를 늘리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정부는 내년 한 해 동안 대출과 보증, 보험 등 정책금융을 통해 14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산업은행은 일반 대출 대비 최대 1.5%포인트의 금리 우대를 제공하는 반도체 저리대출 프로그램을 4조 2500억원 공급할 예정이다.
그마저도 정부의 정책금융 지원 방안은 새로울 것이 없다는 평가다. 산은의 지원방안은 지난 6월 발표된 26조 원 규모 반도체 산업 종합지원 방안에 이미 포함돼 있고, 나머지 금액 역시 내년에 계획된 여러 정책금융 프로그램 중 반도체 분야로 들어가는 부분을 합산해 발표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반도체 기업에 대한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 공제기간을 3년 연장하고, 공제율 상향을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기업의 연구개발(R&D) 시설투자까지 투자세액 공제를 확대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공제기간 연장 추진은 이미 정부 계획으로 발표된 사안인데다, 공제율 상향폭도 정부가 결정하지 않고 국회로 공을 돌려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정부 발표에서 진전을 보인 분야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한 인프라 지원 계획이다. 이날 정부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민간기업과 협약을 체결하고,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는 기업 투자가 마무리되는 2053년까지 전체 10GW(기가와트) 이상의 전력공급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가산단(1단계), 일반산단(1·2단계) 총사업비 약 2조 4000억 원 중 공공이 7000억 원(약 30%)을, 기업이 1조 7000억 원(약 70%)을 분담할 예정이다. 업계에서는 전력망 구축을 위해 부담해야 할 비용이 4조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했던 만큼 기업들은 최대 2조원 이상 비용 감소 효과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완전한 타결까지는 넘어야 할 단계가 남았다. 정부와 기업들은 2039년 이후 조성될 국가산단 2단계 전력망 구축계획과 2044년 이후 3단계 잔여공급방안에 대해서는 비용분담 협의를 지속한다는 계획이다. 2단계 전력망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만 1조 3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국회 반도체특별법 논의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발의한 반도체법에는 R&D 근로자에 대한 주52시간 예외 조항을 두고 있는데 야당 반대에 직면해있다. 민주당은 특별법마다 근로형태를 따로 규정하면 근로기준법이 무력화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