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제도의 정통성은 결국 운영 인물에 달려
‘코드’ 따른 공직 기용으로 제도 정통성 훼손
탄핵사태 거치며 당파성이 인선 변수 될 우려
‘국가적 인물’ 길러내 임명토록 제도화해야
현대 민주주의의 바탕이 된 미국과 프랑스를 보자. 미국에서 정치적 갈등을 종식시키는 최종 판단자는 오랜 기간 연방대법원이었다. 최근 미국에서도 대법관 후보가 지명되면 그의 정치적 성향이 도마 위에 오르긴 한다. 그럼에도 최종심과 헌재의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데다 대법관 9명이 종신직이어서 대체 불가의 막강한 권위를 가진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명한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70)도 눈여겨볼 만하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성향이지만, 제도를 중시하고 중도적 입장에서 판결을 이끌어 대법원의 정통성을 지킨다. 특히 대법관 중 진보 성향이 많은 시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법원은 정치를 대신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신념하에 ‘사법적 절제’를 중시한다. 최근 판사 탄핵을 주장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향해 이례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성명도 냈다.
프랑스는 대혁명기 왕과 왕비를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올렸고, 68혁명으로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뒤엎는 등 군중 분노의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토록 DNA부터 ‘삐딱’한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에 대해 지지를 철회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역사상 탄핵된 대통령은 없지만). 내각제를 택했던 제4공화국엔 수시로 내각불신임이 일어났다.극도의 불안정을 겪은 후 1958년 탄생한 제5공화국은 의회 기능을 축소시키고, 중립적 행정기구를 늘렸다. 방송위원회(CSA) 등 독립위원회들이 대표적이다. 우리와 유사한 제도이지만, 양국 국민이 받아들이는 이들 기관에 대한 정통성은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과 상·하원의장이 임명하는 인사로 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중립성 논란은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주로 확고한 국가관과 균형감각을 갖춘 ‘국가적 인재’들이 발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에서 보듯 제도가 있어도 이를 운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어떤 인물을 발탁할 것인지가 민주주의 제도의 정통성을 지키는 주요 요인일 수 있다. 반면 우리의 문제는 주요 공직에 실력보다는 이른바 ‘코드’가 맞아 기용하고, 그러다 보니 전문성을 따져 발탁됐다 하더라도 정파적 성향 때문일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는 데서 비롯된다. 제도가 작동하기 전부터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한 문제는 이번 탄핵 사태를 거치며 앞으로 어떤 정권에서든 인선 과정에서 정치적 성향을 따져볼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내 편’이 돼 줄 공직자를 더 많이 만들어놓겠다는 의도에서다. 공직사회의 렌즈로 보면 야심 있는 인물들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한 채 직업적 전문성을 키우기보다는 특정 정당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잘못된 교훈을 새길 수 있다. 그렇기에 헌재의 탄핵심판 결과가 이뤄진 뒤에는 어느 때보다 공직사회가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국가만을 생각하는 ‘국가적 인물(stateman)’을 양성하고, 이들을 공직에 임명하도록 하는 제도적 여과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헌법재판관 후보라고 하면 대한변호사협회 같은 관련 단체에서 1차 선별하도록 할 수도 있다.우리 자신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기 생각만 옳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분노의 시대에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비록 정치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독립위원회 직(職)에 임명돼도 그리 분노하지 않는다. 이른바 ‘톨레랑스’라고 부르는 관용 정신 때문이다. 관용은 비록 생각이 다르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공존의 철학이다. 이는 ‘다르게 생각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공적 감정’을 만들어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국가적 인물’을 길러내 공직에 임명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하나의 축이라면, 관용은 우리 사회가 분노와 불복에서 벗어나게 할 또 하나의 축이다. 탄핵 결정 이후 우리가 제도에 대한 정통성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이냐에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임도빈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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