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싸들고 한국 뜨는 백만장자 2400명… 3년 만에 6배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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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한국 떠나는 부자들…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 세계 4위
빠져나가는 자산 20조 원 넘어… “올해 투자이민 상담 3배로 늘어”
기업인 고령화로 이탈 가속화… 상속세 문제가 주요 원인 꼽혀
‘자본이득세’ 도입 등 대안 거론

《#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사장 A 씨는 이미 은퇴할 나이가 됐지만 자녀가 공장을 이어받으려고 하지 않아 후계자 선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22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발효됐다. 혹시 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문제가 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다 점차 사업 자체에 회의감이 생겼다. 고민을 거듭하던 A 씨는 사업을 접고 미국 이민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금 공장을 팔기 위해 내놓고 투자이민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 B 씨는 몇 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와 수백억 원대의 유산을 나눠 상속받으며 거액의 상속세를 납부했다. 상속을 처음 경험해 본 탓에 얼떨결에 절차를 마쳤다. 이후 B 씨 부부는 고령의 시어머니를 설득해 함께 미국 투자이민을 준비 중이다. 만약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또 거액의 상속세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B 씨가 직접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하는 백만장자들이 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이민 자문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지난달 발표한 ‘2025년 부의 이동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한국을 떠나는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가 2400명에 달해 순유출 순서로 세계 4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한국보다 부자가 더 많이 빠져나갈 것으로 추산되는 국가는 영국(1만6500명), 중국(7800명), 인도(3500명) 등 세 곳에 불과하다.

헨리 앤드 파트너스는 부동산 외에 투자 가능한 유동 금융자산이 100만 달러(약 13억5000만 원)를 넘는 부유층이 새로운 국가에서 6개월 이상 거주하는 것을 기준으로 전 세계 부의 이동을 산출한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올해 백만장자 2400명과 함께 자산 152억 달러(약 20조6000억 원)가 해외로 유출될 것으로 분석됐다.

눈여겨볼 점은 해당 기관에서 집계한 한국 이탈 백만장자 수가 매년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는 2022년 400명이던 것이 올해 2400명으로 3년 만에 6배로 늘었다. 전 세계 부자 유출 순위도 같은 기간 9위에서 4위까지 상승했다.

이런 분위기는 현장에서도 감지된다. 투자이민을 자문하는 송지현 미국변호사는 “올해 들어 투자이민 상담 요청 건수가 지난해 대비 3배 가까이로 늘었다”며 “지난해 상담만 받고 (이민) 결정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올해 결정을 마치고 실제 이민에 나서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부자들이 한국을 속속 떠나는 이유가 뭘까.

● “정치적 불확실성, 높은 세금에 부자 떠나”

2025년 부의 이동 보고서는 한국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를 겪은 후 올해 백만장자의 순유출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평가했다. 보고서가 지목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는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건 이후 올 4월 탄핵 선고, 6월 조기 대선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적 갈등과 경기 침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헨리 앤드 파트너스는 중국과의 갈등 심화로 사회적 불안을 겪은 대만(올해 부자 순유출 100명)과 한국을 가리키며 “지정학이 ‘게임의 규칙’을 빠르게 바꿀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다만 부자들이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해외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정치적 불확실성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세금, 투자 기회 등 경제적인 이유가 클 것이란 견해가 많다. 김윤태 고려대 공공정책대학 교수는 “정치적 불안에 의해 올해 부자들의 해외 이주가 늘어난다는 분석도 개연성이 있지만 그보다는 해외 투자와 세금, 자녀 교육 등으로 인한 이주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분석했다.

실제 올해 조사에서는 영국이 이탈 백만장자 수 1만6500명으로 중국을 제치고 전 세계 1위에 올랐다. 영국을 떠나는 부자 수는 지난해 대비 7000명 늘어났는데 이는 영국의 대규모 세제 개편 영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영국은 지난해 10월 자본이득세와 상속세를 대폭 인상하고 ‘비영구 거주자 제도’를 폐지했다. 비영구 거주자 제도는 영국에 살지만 영구 거주자가 아니라면 해외 소득, 자본이득을 영국 내로 들여오지 않는다는 전제로 과세하지 않는 것이 골자다.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가 부자들이 영국을 떠나는 ‘웩시트(WEXIT·부의 이탈)’ 현상을 초래했다”며 “영국의 부자들이 아랍에미리트(UAE)와 모나코, 몰타와 같은 세금이 유리한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UAE(순유입 9800명)는 백만장자들이 새로 자리를 잡는 나라 1위가 됐다. UAE 내의 두바이는 소득세·양도세·상속세가 없다.

한국 역시 세계 기준으로 볼 때 상속세가 높은 편이다. 현행 과세 표준에 따르면 상속 재산이 30억 원을 넘는 경우 최대 50%까지 과세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일본(최고세율 55%)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여기에 최대주주 할증까지 포함하면 상속 재산의 최대 6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창업주의 사망에 따른 상속세 물납에 따라 정부가 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인 NXC 2대 주주로 올라선 사례도 있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을 떠나는 백만장자가 늘어난 데에는 국내 기업인 고령화가 영향을 미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국내 중소기업 대표자 중 60세 이상 비율이 2013년 15.9%에서 2023년 36.8%까지 올랐다. 고령화된 기업인들이 승계를 고민하다 해외 이주를 검토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조세재단(The Tax Foundation)의 ‘2024년 조세경쟁력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OECD 12위였던 한국의 조세경쟁력은 지난해 24위까지 떨어졌다.

● 고소득자 이탈 막을 ‘묘수’ 필요

고소득자의 해외 이탈이 늘어날수록 국내 투자가 위축된다.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거둬들이는 세수가 감소하게 된다. 국가 전체로 볼 때 절대 긍정적이지 않은 현상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부자들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세제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경묵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자들과 함께 자본이 해외로 유출될수록 국내 기업들이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하다”며 “과도한 상속세의 대안으로 자본이득세 도입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본이득세는 상속 재산을 넘겨받는 때가 아닌, 추후 매각할 때 생긴 차액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상속받을 당시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부동산을 상속할 경우 당시 시가가 10억 원이라고 가정할 때 5년 뒤 15억 원에 팔게 되면 처음 상속 당시 상속세를 매기는 게 아니라 차익인 5억 원에 자본이득세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OECD 회원국 가운데 캐나다, 호주, 스웨덴, 뉴질랜드 등 많은 국가가 자본이득세를 채택하고 있다. 캐나다는 1972년 세계 최초로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득세로 전환해 자본이득을 소득에 포함시켜 과세하고 있다. 호주도 상속세가 농민·소규모 사업자의 사업 승계를 어렵게 한다는 여론에 따라 1979년 상속세를 단계적으로 폐지해 1985년 자본이득세를 도입했다. 스웨덴은 70%에 달하는 상속세가 가족기업 경영을 불확실하게 만들어 중산층의 노후 불안정성을 키운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되며 2005년 30% 단일세율의 자본이득세로 전환했다.

안정적인 세수 확보 방안으로 ‘상속세-자본이득세’의 결합 방식도 거론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자산 상속 시점에 최고 30%의 상속세를 부과하고, 이후 상속인이 상속받은 자산을 매각하는 시점에 추가로 자본이득세 20%를 내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제안한 바 있다. 대한상의는 “상속세를 납부하는 방법을 다양화하면 상속 당시에 집중되는 세 부담을 줄여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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