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가 제일 싫어할 소설 … 조지 오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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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경DB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한경DB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에리카 매켄타퍼 노동통계국장을 잘랐어요. 미국 정부가 매달 발표하는 고용통계의 일자리 증가폭이 예상치를 밑돌자 "통계가 조작됐다"고 주장했고, 백악관에 기자들을 불러모아 고용통계 오류를 주장하는 브리핑을 열었어요.

권력자는 통계를 미워합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기록들을 바꾸거나 숨기고 싶어하죠. '정치적 글쓰기의 대가' 조지 오웰이 1949년 발표한 소설 <1984>는 이런 권력의 욕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마치 예언처럼요. 소설이 상상했던 미래, 1984년이 이미 과거가 됐는데도 계속해서 소설이 읽히는 이유입니다.

현실의 권력자가 진실을 조작하고 은폐할 때마다, 그 과정에서 정보통신기술이 동원될 때마다, 이 작품이 소환됩니다. 소설 속 독재자 '빅 브라더'가 현실에 나타났다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독재자가 제일 싫어할 법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죠.

'빅 브라더'의 시작

<1984>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고전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1984년. 21세기에 보기엔 과거지만 소설이 1949년에 나온 걸 생각하면 미래를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정체불명의 독재자이자 감시자 '빅 브라더'가 통치하고 있는 가상의 전체주의 일당독재국가 오세아니아, 그곳의 수도 런던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겪는 사건을 그렸습니다.

윈스턴은 진리부 기록국 소속 직원으로, 검열과 통계 조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가령 풍요부가 4분기 구두 생산량을 1억4500만켤레로 예상했는데 실제 생산량은 6200만켤레에 그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때 윈스턴의 업무는 과거 발표했던 예상치를 5700만켤레로 고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게 아니라 초과 달성한 게 되죠.

독재자가 제일 싫어할 소설 … 조지 오웰의 <1984>

왜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을까요? 우리가 '빅 브라더'란 단어를 감시자의 대명사로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서 나옵니다. 빅 브라더는 집, 거리마다 숨겨져 있는 '텔레스크린' 기계로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감시하고 자신의 사상을 선전합니다. 텔레스크린은 음성과 영상을 수신하고 또 발신할 수 있어요. 표면적으로는 양방향 소통 도구지만 소통은 멸종됐습니다.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죠. 사생활이란 없습니다. 표정조차 죄가 됩니다. 정체를 숨긴 사상경찰들이 개인을 일상적으로 사찰해요.

최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두고 '빅 브라더가 현실화 된다'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죠. 일각에서는 중앙은행이 CBDC를 통해 개인의 소비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라고 우려합니다. CBDC 도입 반대 캠페인을 벌여온 영국 시민단체의 이름은 '빅 브라더 워치'고요. <1984>가 얼마나 현실, 미래와 밀접한 고전인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소설 속 국가의 감시와 형벌은 전쟁을 이유로 합리화됩니다. 1984년의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세 전체주의 국가로 나뉘어 있습니다. 세 나라는 서로를 계속 공격하고 헐뜯으며 전쟁을 일으켜요. 전쟁의 이유조차 희미해졌고 그저 사람들의 관심과 분노, 자원을 외부로 돌려 지배체계를 유지합니다.

오세아니아가 국민들을 통제하는 외부적 근거가 '전쟁'이라면, 내부적으로는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합니다. 바로 '역사'와 '언어'입니다. 진리부는 뉴스와 역사 등 모든 정보를 당의 입맛에 맞게 주무르는 게 역할이에요. 신문이 기록으로서 의미를 갖는 건 수정될 수 없기 때문이죠. 권력자의 발언과 행적이 박제되니까요. 하지만 소설 속 기사는 수시로 수정됩니다. 당의 슬로건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언어' 역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죠. 소설 속에서 당은 각종 공식 용어를 정하고 그것들만 사용하도록 통제합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수시로 없애거나 고쳐요. 그렇게 새로 확정된 공식 용어는 '신어', 이전의 언어들은 '구어'로 불립니다. 왜 이런 수고를 할까요. 공식 용어가 까다로워지면 공문서나 신문기사 등 각종 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언어를 소수가 독점하게 되는 거죠.

있는 단어는 왜 없애는 걸까요?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운 물건이나 문화를 만들어내면 자연히 필요한 단어도 늘어날 텐데, 거꾸로 단어를 줄이다뇨. 신어사전을 만드는 업무를 하는 한 인물은 말합니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한 말 자체를 없애 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

하급 당원인 주인공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자꾸 다른 세상을 꿈꿉니다. 급기야 일기를 씁니다. 일기를 쓰다니! 사생활이나 사상의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 일기 쓰기는 사형 혹은 강제노동 25년 이상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입니다. 윈스턴은 일기장에 되풀이해 적습니다.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

그는 자꾸만 눈에 들어오던 여성 동료 줄리아와 몰래 연인이 되고, 비밀리에 활동한다고 전해지는 반란 세력 '형제단'과 접촉합니다. 당의 모순을 고발하는 금서도 건네받습니다.

둘의 일탈은 곧 발각됩니다. 소설은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끌려가 갇히고 고문받습니다. 윈스턴은 고문을 피하려 거짓 죄를 고백합니다. 줄리아를 배신한 뒤에야 풀려나요. 그는 사상의 자유를 포기하며 몸과 마음 모두 빅 브라더에게 굴복합니다. 빅 브라더를 사랑하기로 한 윈스턴을 보여주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투쟁은 끝이 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윈스턴과 줄리아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소설의 반란은 성공했습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경계하는 고전으로 계속해서 읽히고 인용됩니다.

정치적 글쓰기의 대가

영국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조지 오웰(1903~1950)은 한때 열성적인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행태에 극도로 실망해 강력한 비판자로 돌아섰죠.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화로 묘사한 <동물농장>입니다.

Wikimedia.

Wikimedia.

그는 생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인도의 벵골주(州)의 영국 식민지 모티하리에서 세관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반골 지식인'으로 자랐어요. 고급 관료를 키워내는 명문 사립고교 이튼 칼리지에서 가난한 장학생으로 지내며 차별과 계급의 문제에 눈을 떴어요. 명문대 진학 대신 미얀마 주재 영국 경찰로 근무하며 제국주의 위선을 목격했습니다.

파리에서 접시닦이 등을 전전하며 자전적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한 뒤 르포문학의 고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발표해 주목받았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종군기자이자 민병대 소속 군인으로 참전했고, 그 경험을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로 남겼습니다.

영국 시골에 정착한 그는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집필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0년 1월 21일 런던의 대학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문학으로 권력자의 횡보를 고발했던 오웰이 아내의 성취를 은폐하고 여성들을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대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최근 출간된 <조지 오웰 뒤에서>는 오웰의 첫 번째 아내 아일린 오쇼네시 블레어의 기록을 복원한 책입니다. 블레어는 오웰을 경제적으로 부양했을 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 '세기말, 1984'라는 제목으로 디스토피아 시를 썼습니다. 독재자 스탈린을 비판하는 에세이를 쓰려던 오웰에게 '동물이 나오는 우화로 써보라'고 권했고 <동물농장>의 기획부터 편집까지 도맡았다고 해요.

하지만 오웰은 그녀를 동료 작가로 존중하기는커녕 불륜을 일삼았습니다. 오웰의 명성 뒤에 가려진 행적이죠. 누구나 자신의 권력과 폭력에는 눈이 어두운 걸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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