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 두터웠던 80년대,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 우리 가족 외식을 책임졌던 건 경양식 레스토랑이다. 수프에 후추도 잔뜩 뿌려보고, 접시에 얇게 펴진 쌀밥을 포크로 떠먹는가 하면,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 같은 큰 고깃덩이를 직접 썰어 먹는 '칼질'을 경험해 보는 이색 이벤트였다.
나폴리탄 스파게티 또한 독보적인 존재감이 있었는데, 젓가락이 아닌 포크로 국수를 적당히 뜬 다음 스푼에 대고 돌돌 말아서 먹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통 양식은 아니지만 누구나 한 번쯤 특별한 날에 맛볼 수 있었던 경양식은 대중들이 새로운 음식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경양식은 일본에서 건너온 요소쿠(洋食)에 영향을 받았다. 요소쿠는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양식을 뜻하는데, 나폴리탄 스파게티가 대표적인 사례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개발된 이 요리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의 역사적인 랜드마크, ‘호텔 뉴 그랜드(Hotel New Grand)’에서 탄생했다.
일본 패망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일본에서 군정 통치를 시작했는데, 맥아더 장군이 최고사령관이자 통치자로서 일본에 도착했을 때 처음 3일을 이 호텔에서 투숙했다. 호텔은 또한 연합군 최고사령부 군인 숙소로도 이용됐는데, 당시 군인들이 보급 식량으로 스파게티 면에 케첩을 비벼서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호텔 총주방장이 영감을 얻어 개발한 것이 스파게티 나폴리탄이다.
케첩 스파게티는 일명 '대공황 스파게티'라고도 불렸다. 1929년부터 약 10년간 대공황을 겪은 미국 서민들의 밥상에는 값싸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생겨났다. 이때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된 식재료 중 하나가 스파게티 면인데, 케첩은 물론 마가린, 버터, 햄, 소시지, 캔 옥수수 등 모든 재료를 활용한 비빔면이 한 끼를 채워줬다.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서 먹다 남은 빵가루까지 고명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심지어 주말에 먹은 베이컨 기름까지 따로 모아놓았다가 주중에 스파게티 볶음면을 해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만의 보릿고개를 넘기는 치열한 생존 방식이었다.
이렇게 간단하고 경제적인 식문화는 전장에 투입되는 장병들에게도 효율적인 조리법으로 여겨졌고, 그렇게 군대 식량으로도 전파됐다. 호텔 뉴 그랜드에 머물렀던 군인들은 유년기 시절 대공황을 겪으며 성장한 장병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케첩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자주 보였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폴리탄을 개발한 당시 호텔 총주방장은 일본인 이리에 시게타다(入江 茂忠)로, 스위스 출신 초대 주방장인 살리 와일(Saly Weil)을 계승한 2대 주방장이다. 살리는 요소쿠 퀴진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서양 요리사로 평가된다. 파리에서 프렌치 퀴진 총주방장을 맡은 직후, 1927년 호텔 뉴 그랜드 오픈에 맞춰서 일본으로 무대를 옮긴 후 쌓은 명성이다.
당시 일본에 소개된 양식은 프랑스 요리가 주류였고, 코스 요리 형태라서 진입장벽이 높았다고 한다. 살리는 대중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알라카르트 다이닝을 도입하는가 하면, 쌀로 만든 그라탕, 도리아(ドリア) 등 캐주얼한 요소쿠 메뉴를 개발하며 후배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서양 요리를 대중성 있게 풀어내는 살리 스승을 따르던 이리에 주방장은, 자신이 개발한 요소쿠 스파게티에 스승을 오마주한 이름을 짓게 된다. 스승이 전해 주었던 프렌치 레시피 중에서 고전 기법으로 만드는 프랑스식 토마토 파스타, 나폴리탄(Napolitaine)에서 착안하여 일본식 발음 나포리탄(Naporitan)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일본까지, 다양한 식문화가 스파게티처럼 얽히고설켜서 탄생한 이름의 일화다.
1927년 오픈하여 1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호텔 뉴 그랜드는 근대 요소쿠 퀴진의 주요 발상지로 꼽힌다. 스파게티 나폴리탄 메뉴 또한 오리지널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데, 호텔 본관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맛볼 수 있다. 아르데코 클래식 건물에 깔끔한 인테리어, 그 안에서 차분한 태도로 음식을 즐기는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반듯하게 느껴지는 카페다.
스파게티 나폴리탄 또한 장소와 어울리는 정갈한 맛을 자랑하는데, 케첩 스파게티로 알려진 명성과 다르게 케첩이 아닌 특제 토마토소스를 쓴다는 점이 의외다. 무염 버터, 소금, 후추, 버섯, 햄, 파슬리가 섞여서 묘한 풍미를 자아낸다. 대중화된 나폴리탄 스파게티처럼 코끝을 시큼하게 달구는 케첩 맛 대신, 절제된 토마토퓌레 베이스의 달짝지근함이 느껴지는 것이 딱 우리네 고급 경양식 감성 한 스푼을 담은 맛이다.
스파게티라는 요리는 접시 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특별한 날 먹는 외식 경험, 생존을 위한 식량, 정통 이탈리안 파스타, 혼자 돌려먹는 간편식 등,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것이 우리네 삶인 것처럼,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는 식문화의 순환은 우리 인류에게 포크를 빙글빙글 돌리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1 week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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