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황 악화 여파로 수원, 용인, 화성, 평택 등 경기 남부지역 ‘반도체 도시’의 재정 운영에 빨간불이 켜졌다. 삼성전자 본사 및 반도체 사업장이 있는 이들 4개 도시는 2015년부터 2023년까지 9년간 삼성전자에서 법인지방소득세 4조3859억원을 징수해 풍요를 누렸다. 하지만 2023년 실적 부진으로 삼성전자가 이듬해 법인지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못하자 계획한 도로, 도서관, 공원 등 인프라 건설과 복지 사업이 잇달아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18일 한국경제신문이 집계한 데이터에 따르면 4개 도시는 2015~2023년 삼성전자에서 법인지방소득세를 연평균 4800억원가량 징수했다. 법인지방소득세는 기업이 전년 실적에 따라 이듬해 납부하는 세금이다. 전체 법인세 중 10%를 지방소득세 명목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가져간다. 성장 기업을 둔 지자체에는 마르지 않는 곳간으로 여겨진다.
경기 남부 4개 도시도 지난 10년간 기업이 낸 세금을 재원으로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주민 복지 개선, 개발 등 각종 사업을 추진해 도시를 발전시켰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펼쳐진 2019년엔 삼성전자가 납부한 8279억원이 4개 도시로 흘러 들어갔다. 화성이 3262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수원(2820억원), 용인(1290억원), 평택(907억원) 순이었다. 같은 해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 82개 모든 군에서 걷은 지방소득세 총합(8439억원)과 맞먹는 규모다.
삼성전자가 4개 도시에 납부한 법인지방소득세는 2020년 4119억원, 2021년 3845억원으로 줄었다가 2022년과 2023년엔 각각 7348억원, 5607억원으로 다시 늘었다. 2019~2023년 4개 도시 전체 지방소득세 중 삼성전자가 기여한 비중은 19.7~39.4%였다.
하지만 2023년 삼성전자가 개별재무제표 기준 11조원 넘는 적자를 내자 2024년엔 법인지방소득세 납부가 완전히 끊겼다. 4개 도시는 이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 ‘2025년 예산안’을 급하게 수정했다. 서종국 인천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지방 재정에서 기업이 낸 세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커지고 있다”며 “기업과 도시는 동반자와 같아서 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 도시 발전도 더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年 수천억 쓴 수원·용인·화성·평택…반도체 '세수 제로'에 비상
지자체 '긴축 재정' 사업 올스톱
18일 경기 용인시 기흥구 한국민속촌 인근의 왕복 6차선 도로 공사 현장은 곳곳에 안전 펜스가 설치된 채 방치돼 있었다. 용인시는 길이 1.45㎞ 도로(터널 길이 260m 포함) 건설 사업을 올 들어 중단했다. 관련 예산 부족 때문이다. 삼성전자로부터 들어왔던 법인지방소득세가 지난해 끊긴 여파로 이 도로를 포함해 용인시가 추진하던 3개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용인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세금으로 수백억원을 납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마다 예산안을 짜왔다”며 “2024년 실적에 따른 법인지방소득세가 들어오면 하반기엔 공사를 재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기업 성장이 곧 도시 성장
2023년 5602억원이던 삼성전자 납부 법인지방소득세가 지난해 ‘0원’이 되자 수원·용인·화성·평택 등 4개 도시는 어쩔 수 없이 주민 편의시설, 복지정책, 도심 인프라 개선 등의 사업을 중단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4개 도시는 반도체 경기 호황 때 삼성전자가 납부한 세금을 재원으로 다양한 정책을 펼쳤지만 갑작스러운 업황 악화로 재원이 급감하면서 ‘예산 다이어트’에 내몰렸다.
삼성 반도체 벨트의 4개 도시는 그동안 삼성전자 덕분에 지역 곳곳에 시민 편의시설을 어렵지 않게 확충할 수 있었다. 법인지방소득세는 사업장 면적과 종업원 수에 따라 책정되기 때문에 기업이 성장하면 그만큼 지역 세수도 늘어난다.
삼성과 50년 이상의 인연을 맺어온 수원은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도시도 함께 부흥했다. 삼성전자는 1969년 수원에 첫 반도체 공장을 건립했고, 2000년대 이후 각종 연구개발(R&D) 시설을 조성했다. 수원이 지난 20년간 지은 고가차도 9개 중 8개, 지하차도 37개 중 29개가 삼성이 낸 세금을 재원으로 건설했다는 게 수원시의 설명이다.
◇ 조세 수입의 35% 차지
이뿐만이 아니다. 수원은 지난 10년간 1조5130억원을 삼성전자로부터 세금으로 걷어 광교홍제도서관, 호매실도서관 등 11개 도서관도 지역 곳곳에 지었다. 광교복합체육센터(사업비 550억원) 등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는 종합체육시설 4개도 건설할 수 있었다. 1971년 건설된 수원종합운동장 내 야구장을 2013년 290억원을 투입해 리모델링했고, 이후 열 번째 프로야구단인 KT 위즈 유치로 이어졌다. 삼성전자가 지방자치단체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낸 2019년의 경우 법인지방소득세를 포함해 삼성전자 수원에 납부한 세금의 총액은 그해 수원시 전체 조세 수입의 34.4%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화성시는 지난해 100억원 이상의 출산지원금을 지급했고, 올해 역시 5000억원의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등 매년 전국 최대 규모로 지역화폐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용인시는 수년간 도서관 사업을 확대해왔다. 그 결과 관내 수지도서관은 지난해 도서대출 수 전국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4개 도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넉넉한 재정 잔액 덕분에 여러 사업을 자신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세수 부족에 인프라 사업 ‘빨간불’
하지만 2023년 삼성전자 실적 악화로 이들 도시의 재정에 비상등이 켜졌다. 평택시는 세수 부족에 따른 긴축 재정에 들어갔고, 시장 등의 업무추진비를 20%씩 자진 삭감했다. 하반기 착공하려던 노후 시청사 신축 계획도 당분간 보류했다.
화성시는 여울공원 전시온실, 시립미술관, 해안길 조성, 시립유스호스텔 등 각종 시민 편의시설 건립 계획을 하반기로 미뤄놨지만, 언제 착수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수원시 역시 세수 부족으로 지방정부의 ‘비상금’으로 불리는 통합재정안정화기금으로 재정을 메웠다. 4개 도시의 예산 부서 담당자들은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의 일시적 실적 부진의 파장을 실감하고 있다”며 “올해는 역점 사업의 예산을 대폭 칼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김영리/조철오/권용훈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