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투표 전날의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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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투표 전날의 성찰

대통령 선거 본투표 전날인데도 선거판 형세에 대한 정보가 없다. 여론조사 결과를 투표 전 며칠 동안 발표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 때문이다. 이런 조치는 유권자가 다른 사람들의 의향에 영향받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조리가 닿지 않는 일이 유난히 많은 사회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 가운데 백미다.

개인들은 되도록 많은 정보를 얻어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쓴다. 정보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하면 누구나 덜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당연히 사회 전체가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사회를 이루어 사는 터라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의 의향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다. 그런 정보 없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결정인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것은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이 같은 부조리에 대해 비판은 그만두고 탄식조차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경제 체제다. 자유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얻어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역인 전체주의적 권위주의를 구성 원리로 삼은 사회에선 시민이 정확한 정보를 많이 얻는 것이 긴요하지 않다. 시민들은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참여하면 된다. 시장경제의 역인 명령경제에선 시민은 중앙당국에서 할당해준 일을 하면 된다. 실제로 전체주의 명령경제의 비효율과 억압은 시민이 합리적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한 데서 나온다.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는 깊이 반민주적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두 여론조사를 해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 활용한다. 힘없는 일반 시민만 열등한 처지에 놓인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보다 더 권위주의적인 조치는 생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 조치는 시민의 전략적 판단을 방해한다. 우리 선거 제도엔 결선투표가 없다. 따라서 시민들은 스스로 3위 이하 후보에 대한 지지를 거둬 사표를 막는다. ‘깜깜이 기간’이라고 불리는 이 조치는 시민의 전략적 투표를 방해해 진정한 민심이 투표에 반영되는 것을 막는다.

해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부족하면 으레 암시장이 생긴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들은 비쌀 뿐 아니라 품질이 조악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도 많은 ‘가짜’ 여론조사 결과가 유통됐을 것이다.

깜깜이 기간엔 현실적 위험도 따른다. 좀 거친 비유를 들면 깜깜이 기간은 육상 100m 경주에서 마지막 10m를 남겨두고 관중이 경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경주가 끝난 뒤 심판이 최종 성적을 발표하면, 관중은 그 발표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 얼마나 기괴한 풍경인가! 무엇보다도 이런 조치는 경주를 재미없게 만든다. 대통령 선거는 가장 흥미로운 정치적 행사인데 결정적 장면을 시민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고도 투표를 하라고 독려한다?

게다가 그런 깜깜이 기간은 필연적으로 반칙과 부정의 위험을 키운다. 여론조사가 끝까지 이어진다면 선거 부정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러 해 전부터 많은 시민이 선거 부정을 걱정해 왔다. 이 문제는 국제적 추문이 돼 며칠 전엔 미국 민간인들의 ‘국제선거감시단’이 입국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 국제형사재판 담당 특사를 지낸 모스 탄 대사를 단장으로 한 선거·안보 전문가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치른 첫 선거인 1948년의 총선거는 국제연합이 주관했다. 북한의 공개적 비난과 방해로 선거 기간에 수백 명이 죽고 더 많은 사람이 다쳤지만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은 “유권자들의 자유 의지의 유효한 표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이제 와서 선거 부정의 위험이 크다고 우방 미국에서 감시단이 찾은 일은 고맙지만 더할 나위 없이 부끄럽다.

깜깜이 기간이라는 부조리를 없애는 일은, 그래서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을 관객이 스스로 확인하도록 하는 일은 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굳게 해서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번엔 이 부조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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