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황이고, 당신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공황이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이러다가 끔찍한 공황이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하는 짙은 위기감이 엄습해 온다. 절대 위기의 상황이다. 밖에서 가해지는 위협 때문만이 아니다. 안에서 먼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의 확산이 더 무섭다.
3년여 전 대선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갈등의 정치학’을 끝내고 ‘혁신의 정치학’’이란 제목의 칼럼을 쓴 기억이 난다. 신(新)냉전의 외부 위협을 직시하고 갈등의 엔트로피를 혁신 에너지로 바꿔 미래로 가는 정치 시대를 열어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도 없다고 단언했다. 결과는 ‘갈등의 정치학’으로 잃어버린 3년을 더한 꼴이 되고 말았다. 경제성장률은 0%대로 내려앉고 있다. 비행기 추락을 막기 위해선 준수해야 하는 실속속도(失速速度·stall speed)가 있다. 성장률이 특정 수치 밑으로 떨어지면 경착륙이다. 추락의 고통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다시 대선이 끝난 지금 대한민국은 더 물러설 곳도 없다. 새 정부는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 ‘정부는 무한정 돈을 풀 수 있다’거나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가설은 상상 속 극단일 뿐이다. 어느 쪽도 현실 경제와 맞지 않는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한 ‘탈(脫)구축’(deconstruction)의 필요성은 경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경제안보 시대다. 정부와 시장의 긴밀한 대화가 없는 국가는 운명이 위태롭다.
정부가 할 일, 시장이 할 일의 정상화가 절실하다. 정책 배합을 놓고 무엇이 최적인지, 피할 수 없는 구조개혁을 어떻게 할지를 둘러싼 논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면 창의적 해법의 자산인 ‘차이’가 존중돼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완전 불확실성’(true uncertainty)을 헤쳐나가는 데는 다양성만큼 강한 무기도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복원하는 일 또한 시급하다. 인공지능(AI) 공약이 넘쳐난 선거였지만 인재 없이는 다 공염불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다. 그 기업가정신의 인프라는 과학기술이고, 과학기술은 인재다. 인재가 떠나면 과학기술도, 기업가정신도, 자본주의도 없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에 이념의 색깔을 입히는 정부, 획일적 과학기술 예산 감축의 칼을 휘두르는 정부에서 비전을 느낄 과학기술 인재는 없다. 정치가 과학기술을 뒤덮는 ‘테러’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새 정부가 정치와 과학기술 관계의 선진화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더 근원적으로 새 정부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나라 안팎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위기에 직면한 형국이다. 단짝으로 여겨온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를 탓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양극화를 심화시켜 위기에 빠졌다고 비난하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흐르면서 위기를 불렀다고 반박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새로운 ‘공진화’(coevolution)의 길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유’를 매개로 손을 잡은 관계라는 점이다. 2015년 독일 영화 ‘돌아온 히틀러’의 테마는 파시즘의 부활이었다. 대한민국은 중국식 권위주의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주는 또 다른 권위주의 자본주의도 우려한다. 이에 동의한다면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전체주의 집단의 폭주, 바로 파시즘이다. 포퓰리즘의 위험성도 여기에 있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한 다음, 적(敵)을 지목해 문제의 책임을 전부 돌리는 선동 수법은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이나 똑같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일반 불가능성 정리’를 통해 선거의 한계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비록 선거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이유는 논리를 뛰어넘는 암묵의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적어도 기본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오늘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서로의 다름을 껴안아 주는 나라, 다양성 관용성 개방성으로 혁신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새로운 출발이다